차는 일단 몰고 나왔는데 목적지가 없습니다.
어젯밤 생각한 것은 대략적인 방향뿐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업무적으로 항상 다니던 길만 다녔었기에 리비아의 구석구석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습니다.
결국 목적지에 대한 고민은 담배연기에 실어 차창 밖으로 내보내 버리고 맙니다.
사실 특정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보다는 발길 아닌 바퀴 닿는 대로 가보지 않았던 곳을 돌아다니는 게 더 편하고 유익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의 일정도 오피러스(회사차임 ^^)의 선택에 맡기기로 합니다.
아침은 한 여름 작열하는 태양에 노출된 영혼에 부어지는 한 줄기 찬 물인지도 모릅니다.
주중에 이런저런 일로 사분오열된 영혼은 이 찬 물의 냉기에 모자이크처럼 다시 제자리를 찾습니다.
이내 내 안의 심연이 아침공기처럼 무게를 더하더니 지중해처럼 깊어집니다.
그 안에서 불현듯 솟아오른 이름 모를 꽃들에 대한 환영이 새털 날개가 되어 심신을 부양시킵니다.
간밤에 불면을 야기했던 일상의 질곡들에 대한 기억들이 지평선 위 뜬 구름 대열에 합류합니다.
변화 없는 삶은 너무 단조로워 오히려 무의미하다는 평소의 지론에도 불구하고 오늘만은 이 아침의 행복이 더도 덜도 말고 딱 이만큼만 매일 반복되기를 소원해봅니다.
길가의 노랑뿔양귀비의 큰 꽃송이 하나가 내 심연 위로 날아 와 돛단배가 됩니다.
일순 수면이 침묵을 포기하고 잔 물결로 화답합니다.
차는 미주라타로 향하는 길 위를 조용히 미끄러집니다.
150 ~ 160을 유지했던 속도를 대폭 줄입니다.
잠시 줄어든 속도만큼의 간극에 이곳 부임 초기의 기억을 채워봅니다.
당시는 업무 차 250키로 정도나 되는 이 길을 거의 매일 왕복하다시피 했습니다.
기사는 있었지만 장거리 승차로 인한 피로감이 상당했었지요.
그렇지만 그 피로감에 불만을 토로할 여유는 애당초 명함 한 번 제대로 내밀어보질 못했습니다.
나를 미주라타로 가게 만든 업무 자체의 중압감 앞에서 난 항상 물먹은 소금가마였었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던 그 일도 시간이란 해결사 덕분에 지금은 이미 기억공간 어딘가에 방석 하나 깔고 앉아 있습니다.
업무의 강요가 있지 않는 한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마음 먹었던 이 길을 불과 몇 달 지나지 않아서 난 다시 달립니다.
반추는 본래의 미추를 가리지 않고 모든 기억에 무지개를 달아주나 봅니다.
당시의 업무와 그를 위한 비자발적인 드라이브에 대한 기억은 내가 부여했던 무채색 등급을 이미 한참 벗어나 있습니다.
당시 나를 지탱해 주었던 유일무이한 반려는 바로 야생화 출사라는 취미생활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난 휴일만 되면 차를 몰고든 걸어서든 디카 하나 달랑 들고 어딘가로 떠났습니다.
그 떠남이 이 나무 저 가지에 걸려 있던 내 마음 조각들을 붙잡아 들이곤 했습니다.
야생화 출사라는 명분 이면에 나도 모르는 쇠스랑이 하나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취미생활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대견해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정도의 적응기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가끔은 이 쇠스랑의 존재가 필요하거든요.
한 시간 반여를 달리다가 어느 사거리에서 우측으로 핸들을 돌립니다.
차를 세우고 잠시 길을 살핍니다.
우선은 길이 비포장이라서 마음에 듭니다.
포장도로가 있다는 건 곧 인공건축물이 주변에 많다는 말과 상통합니다.
야산을 굽이도는 우리나라 시골길 같은 사행도로를 최대한 저속으로 서행하면서 주변의 식생들을 살핍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특별한 열대식물 하나 만나리란 기대는 충족되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가다 보니 우측에 엉겅퀴 종류로 보이는 식물 군락이 하나 나타납니다.
키는 작지만 잎에 달린 가시가 아주 매워 보입니다.
대부분은 꽃이 흰색인데 개중에 몇 포기 정도는 노란색 꽃을 매달고 있습니다.
너무 강한 햇볕 때문에 디카 액정이 제 기능을 충실히 수행해내지 못합니다.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충 감만으로 사진을 찍습니다.
그 잠깐의 작업만으로도 이마에 땀이 방울방울 맺힙니다.
흔들리지 않기 위해 온몸에 바짝 힘을 주어야 하니 사진 찍는 일도 쉬운 작업은 아니란 걸 다시 한 번 느낍니다.
차 안으로 들어와 잠시 쉬는데 뜬금없이 꽃 이름에 대한 의문 하나가 휴식을 방해합니다.
저 흰색 꽃을 가진 녀석의 이름을 엉겅퀴라고 한다면 노란색 꽃을 피운 녀석은 노랑엉겅퀴쯤 되겠지?
만약에 누군가가 노랑엉겅퀴에게 엉겅퀴란 이름을 먼저 붙여주었다면 흰색의 꽃을 가진 녀석은 아마도 흰엉겅퀴가 되었을 거야.
그런 이름이 도대체 저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자기들은 나름대로의 생존전략에 따라 각자 주어진 환경 하에서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진화를 하였고 또 그 과정을 지금도 계속 이어가고 있다는 진실은 우리가 붙여주는 이름과는 일말의 연관성도 없는 거잖아.
그러고 보면 내 야생화 탐사는 본질은 외면하고 외관에만 신경 쓰는 어리석은 행위일 뿐이네.
그들은 내가 그 이름을 불러줄 때 비로소 내게로 와서 꽃이 되는 게 아니고 내가 이름을 안 불러줘도 원래 꽃이잖아.
야생의 꽃 자체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난 이제까지 내가 만든 꽃을 대신 내 안에 지식이란 이름으로 쌓아 놓고 있었던 셈이 되는군.
내 시선에 부끄러운 각성을 실어 보내보지만 녀석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다시 주 도로로 들어서 한 시간여를 더 달립니다.
이번에는 홈즈를 조금 지난 지점에서 도로 좌측 편으로 꺾어진 포장도로로 들어섭니다.
주도로가 해안도로는 아니지만 도로 좌측 편으로 어느 정도 들어가면 모두 지중해입니다.
이 나라에서는 산야보다는 해안에 더 다양한 식생들이 서식하고 있다는 그간의 내 경험이 내 의식에게 좌회전을 명령했겠지요.
길가에 "소돔의사과"라는 일반명을 가진 나무가 많이 도열해 있습니다.
도대체 열매가 얼마나 사과를 닮았기에 그런 일반명을 가지고 있을까 하는 평소의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차를 세우고 내려서 관찰해 봅니다.
열매가 생각보다는 상당히 큽니다.
가지들은 그 크기만큼의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었는지 대체로 끝이 휘어 있습니다.
외관은 전혀 사과를 연상시키지 않습니다.
쭈글쭈글한 과피는 차라리 못 생긴 초록색 오렌지나 무슨 커다란 짐승의 고환을 연상시킵니다.
꽃 이름에 대한 반성이 아직은 채 안 식었는지 저런 모습의 열매도 이 나무에게는 하나의 전략이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열매의 외관에 대한 내 인상을 지워버립니다.
이 한낮의 열기가 건설 근로자들에게는 지난한 역경 중 하나이겠지만 이 나라에 있는 식생들에게는 일종의 자연의 시혜인 모양입니다.
석류나무도 데이트야자도 무화과나무도 이름 모를 관목들도 모두 알알이 열매를 매달고 있습니다.
기후변화가 심하지 않아서인지 이 나라 수목 중에는 열매를 맺어가는 와중에도 개화를 시도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소돔의사과만 해도 한 그루에서 그런 결실과 개화를 병행하고 있었습니다.
조만간 이들은 자연이 정해주는 때에 맞춰 속살이 꽉 찬 종자들을 멀리 떠나 보내겠지요.
뜬금없이 이 자리에서 그간 나를 떠났던 많은 인연들을 떠올립니다.
어떤 적극적인 해석을 하더라도 이별이란 서글프기 마련입니다.
나무처럼 그 별리를 무덤덤하게 숙명으로 받아들이려면 얼마나 더 많은 수양이 필요할는지.
포장도로가 끝난 지점에서 좁은 흙 길로 들어섭니다.
백미러로 뒤를 보니 어린 시절의 소독차가 뿜어내는 연막처럼 흙먼지가 자욱합니다.
길은 구불거리며 해안까지 바로 이어집니다.
몇몇 현지인들이 차를 모래사장 근처에 주차해놓고 해수욕을 즐기고 있습니다.
작은 사구 위에서 에린지움 여러 포기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전에 보았던 것과 색이 좀 다릅니다.
잎과 꽃차례에 유난히 보라색을 많이 띠고 있습니다.
혹시나 다른 종이 아닐까 하여 요모조모 살펴 가며 특징적인 부위를 디카에 담습니다.
같은 포기에서도 녹회색과 보라색을 띤 것들이 공존하는 것으로 보아 별종은 아니고 원래 이렇게 피기도 한다고 잠정 결론을 내립니다.
모래사장 차 옆에 천막을 처 놓고 휴식을 즐기던 현지인들이 내 작업을 계속 응시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사진기를 가진 사람 자체도 그다지 많지 않지만 식물 사진은커녕 풍경 사진을 찍는 사람조차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외계인쯤으로 생각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20여 년 전 여기 근무할 때는 회사의 동료 하나가 풍경 사진 찍다가 미국의 간첩으로 오인되어 감옥까지 간 경우도 있었을 정도입니다.
지금 강산이 두 번도 더 변한 세월이 흘렀지만 그들의 사진에 대한 몰취미는 여전합니다.
나도 얼마 전에 모르고 군사지역에 들어가 차량을 샅샅이 검문 당한 당혹스런 경험이 있습니다.
그 뒤로는 비록 대상이 식물이긴 하지만 사진 찍는 일 조차도 조심스러워졌습니다.
그래도 외국인에 대한 편견이나 적대감이 팽배해 있는 이 나라 사람들보다는 공존과 평화를 사랑하는 식물과의 대화에 대한 매력은 쉽게 포기하기 어렵기에 오늘도 이렇게 초행길을 감히 헤집고 다니고 있습니다.
바닷가 언덕 위로 올라가 봅니다.
안쪽으로 반원처럼 휜 만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삭막한 리비아의 풍광 중에서 그나마 우리의 경험치가 고착시킨 선입견을 충족시켜 주는 건 바다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잔 파도가 겹겹이 해안으로 밀려듭니다.
그 고요한 파도의 행보가 해안의 야자수와 짙푸른 하늘의 옅은 구름과 어울려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 되어 내 안의 화폭에 담깁니다.
단지 두어 가지 색만으로도 이렇게 환상적인 수채화가 가능하다는 게 신기하기만 합니다.
내 일상도 저 파도처럼 층을 이루어 어딘가로 흘러 가고 있을 겁니다.
내 일상이 매일 그려내는 조악한 그림이나마 최상의 수사와 함께 화폭에 담아주는 누군가가 내 곁에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그렇게 길도 제대로 없는 해안을 드라이브하면서 초면의 야생화를 몇몇 만납니다.
쓸데없는 질문인 줄 알면서도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왜 그 자리에 있느냐고.
당연히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존재는 질의응답의 대상이 아니라 느낌의 영역에 속한다는 듯이.
한 줄기 미풍이 머리 위 위성류에 부딪쳐 산산이 흩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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