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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단상(斷想) 모음

어떤 고즈넉한 풍경

by 심자한2 2010. 8. 18.

 

인터넷 사전에서 "고즈넉하다"의 의미를 찾아본다.

"고요하고 아늑하다"는 게 어의다.

가끔 이 낱말을 사용하고는 있었지만 정확한 뜻이 항상 궁금했었다.

대략 적막의 이미지와 연결될 때 이 단어를 써먹곤 했었는데 다행히도

본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지금 난 내 사무실 의자에 몸을 깊숙히 묻고 둥지 안에서 부화를

기다리는 새알처럼 아무렇게나 앉아 있다.

날씨가 더운 탓에 에어컨 바람만으로는 피부에 닿는 공기에서 더운

기운을 빼내기에는 역부족이어서 선풍기까지 곁들였다.

싸구려 선풍기는 제 값 이상의 노동에 대한 불만이라도 토로하고 싶은

건지 제법 요란하게 툴툴거린다.

옆 사무실에서는 무슨 토론들을 그리도 길게 하는지 제법 드센 직원들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진다.

이런 상황인데도 내 머리 속에는 "고즈넉"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그다지 고요하고 아늑하지 않은 이 분위기와는 궁합이 별로 일 것 같은

이 단어가 왜 하필 지금 내 상념 속에서 물 위의 부유물 흉내를 내는지

모르겠다.

 

내친 김에 "고요하다"라는 단어도 인터넷 사전에서 찾아본다.

"잠잠하고 조용하다.", "조용하고 평화롭다."라고 나와 있다.

이 사전적 의미에 의한다면 분명 "고즈넉"과 "고요"는 소리가 없는

상태를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많은 소리 속에 갇혀 있는 내게 내 무의식은 무슨

연유로 고즈넉이나 고요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까?

아마도 내 현재의 심리상태를 그렇게 표현하고 싶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근자에 참으로 많은, 난마처럼 얽힌 골치거리들로 인해 마음에 깊은

골이 많이 패였었다.

시간이 흘러 그런 난제들도 어느 정도 해결되고 나니 여유란 놈이

제 역할을 하기 위해 내 안에 한 발을 들여놓은 모양이다.

주름 졌던 마음도 그 여유의 다림질로 꽤나 반반해졌다.

내 하루 일과표를 채우고 있는 기본업무들도 적진 않지만

그런 것들은 두통까지야 수반하지는 않는다.

그래서일까, 지금 내 몸은 사무실 안에 갇혀 있으면서 동시에 내가

그린 그럴 듯한 풍경 속에 놓여 있다.

그 풍경이 비록 산수화는 아닐지언정 세사의 번잡한 소리들은

이미 화폭 뒤로 걸러진 상태이다.

그러니 난 지금 고즈넉한 분위기에 있다는 스스로의 표현이 그다지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평소 일상이 드리우는 그늘 색이 내게서 짙어질 때마다 난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자연과 벗삼아 지내고 싶다는

소망을 내 자신에게 세뇌시켰다.

현실도피라는 진의는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자연으로의 회귀라는

명분의 위세에 눌려 감히 제 목소리를 낼 엄두를 내지 못 했다.

내 몸은 비록 항상 있던 그 세상 속에 있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은

내 마음은 내가 그린 산수화 속에 점경인물로 들어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산중칩거가 거의 불가능한 현실 속에서 가끔은 이렇게라도

자연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도 작은 행복이 아닐까 싶다.

다소 억지스럽긴 하지만 어쩌랴, 세상사가 다 그런 걸.

그렇게라도 고요하고 아늑한 분위기 속에 들어가려는 노력은

아무나 보유할 수 없는 삶의 지혜라고 자위할 수밖에.

 

선풍기를 끈다.

순간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에어컨 소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득세를 한다.

창밖 야자수 위에 앉아 있는 새들의 지저귐이 에어컨 소리에 섞인다.

전혀 이질적인 두 소리가 만드는 불협화음 정도는 이제 내 고즈넉한

분위기에 훼방꾼이 될 수가 없다.

난 이미 그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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