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식물/갤러리-풀꽃나무

봄을 찾아나섰다가....

by 심자한2 2015. 3. 11.

 

내가 알고 있는 동네 인근 산의 너도바람꽃 군락지는 계곡 아래쪽에 있습니다.

그 계곡 위쪽으로 끝까지 올라가본 적이 없어 항상 숙제처럼 남아 있었는데 오늘 갑자기

그 계곡 생각이 나네요.

혹시 지금쯤 예상치 못한 야생화가 피어 있지나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불쑥 솟더니 이내

내게 안온한 방콕 여행 포기를 종용합니다.

이 시기에 가봐야 할 곳도 마땅치 않은 터에 잘 됐다 싶어 짐짓 못 이기는 체 그 계곡을 한

답사해보기로 결정합니다.

 

요 며칠  온기를 더해 가던 대지가 꽃샘추위로 다시 식었는지 막상 그 계곡에 도착해보니

며칠 전 보았던 초입의 너도바람꽃 몇 무더기 이외에 추가로 돋아난 꽃들은 거의 없네요.

미리 세상 구경을 나왔던 녀석들도 이전 대면 시에는 만개하지 않은 상태라 핸드 마이크

형상이었는데 지금은 모두들 꽃잎 같이 생긴 꽃받침을 위성 안테나처럼 활짝 벌리고 있네요.

문제는 예상치 못했던 갑작스런 기온 저하에 주눅이 들었는지 하나같이 고개를 떨군 채

둉무들보다 발빨랐던 행보를 후회라도 하고 있는 듯한 행색이라는 겁니다.

혹은 마른 나뭇가지 밑에서, 혹은 수북한 낙엽 더미 사이에서, 혹은 바위 틈새에서 시립하고

있는 모습이 마치 꾸지람을 듣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애처로와 보이기까지 합니다.

어쩌면 녀석들은 나름대로 계절 선점의 행복을 한껏 즐기고 있는데 궂은 날씨에 연유한

내 연민의 정이 오인을 유발하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입니다.

 

 

 

계곡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봤지만 신록이 본격적으로 출현할 날은 요원해 보이기만

합니다.

희미하게나마 단속적으로 길은 이어지긴 하는데 이게 사람이 통행한 흔적인지

아니면 산짐승이 이동한 흔적인지 확연치 않습니다.

계곡에는 휘어진 다래 덩굴과 관목들 가지들만 누군가의 뒤틀린 심사처럼 아무렇게나

뒤엉켜 있네요. 

그 모습이 마치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할 봄을 성급하게 찾아 나선 내 조급과

초조를 책망이라도 하는 것 같다고 느낄 무렵 계곡 끝부분에 도달합니다.

계곡에서 아무런 봄기운도 감지해내지 못했지만 봄이 무르익을 무렵 다시 한 번

이 계곡을 방문해볼 가치가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 게 소득이라면 소득입니다.

 

내친 김에, 혹은 오기가 발동해서 경사가 심한 능선 쪽으로 계속 기어올라가 보기로

합니다.

낙엽 밑에 잠복해 있는 부러진 잔가지들이 내 등산화의 접착력을 훼방하는 바람에

번이고 미끄럼을 타는 천신만고 끝에 주능선에 오릅니다.

막상 주능선에 오르고 나니 이번에는 골을 훑고 올라온 강풍이 전신을 무차별로

난타합니다.

온화하진 않았어도 바람이 없던 날씨가 갑자기 표변한 겁니다.

신구 계절 간 인수인계는 이미 끝났으리란 내 추정이 착각이었다는 걸 인식시켜

주려는 의도치고 초봄의 차가운 강풍이 제법 맵군요.

대적할 수 없으면 피하는 것도 훌륭한 임기응변이라는 생각에 커다란 바위 뒤에

몸을 기대고 바람이 제풀에 지쳐 그 강도를 낮출 때를 기다려봅니다.

 

문득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성긴 나뭇가지 사이로 드러나는 건 먹구름뿐입니다.

오늘 낮에 약하나마 눈비 소식이 있을 거란 기상예보가 맞긴 맞을 모양입니다.

꽃샘추위의 기승은 오늘쯤 끝날 거라고 했으니 하루만 더 기다렸다 올 걸 하는

후회보다는 기왕지사 결행한 나들이이니 겨울의 마지막 포효를 차라리 감상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게 좋겠다는 내 속마음을 읽고 도전의식이라도 든 건지 교목들

위를 지나는 바람이 갑자기 볼멘 연주를 시작합니다.

내 지나온 삶의 노정에 알알이 박혀 있는 변곡점들이 음표가 되어 놓인 악보처럼

바람의 연주는 음률이나 화음과는 거리가 멉니다.

퇴장을 거부하는 지난 계절의 단발마와 꽃눈과 잎눈을 잔뜩 매달고 하루하루

진정한 신춘의 도래만 기다리고 있는 나무들의 저항이 맞부딪치는 소리일진대

어찌 리듬을 기대하리요.

 

바람이 쉽게 잦아들 기세가 아닌지라 바위 은신처를 벗어나 계속 길을 잇기로

합니다.

봄의 저항이 만만치 않은지 바람의 허풍은 자못 크지만 그 위세는 한겨울만

못하다는 걸 피부로 느끼며 걷습니다.

걷는 도중 갑자기 사위가 어두워져 계곡 쪽으로 눈을 돌려보니 가는 눈발이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습니다.

마누라의 잔소리를 사랑스런 미소로 받아내는 신혼 남편처럼 나도 지난 겨울의

마지막 앙탈을 즐기기로 마음 먹고 휘날리는 눈발에 한참 눈길을 줘봅니다.

몇 개의 봉우리를 지나 한 안부에서 내리막 길로 접어든 지 얼마 안 돼 바람은 그새

기력이 소진했는지 강도가 대폭 약해졌네요.

 

그 틈새를 비집고 이런저런 상념들이 뇌리로 뛰어듭니다.

아름다웠던 과거지사나 반추해볼 심산이었는데 현재 내가 처해 있는 불호한 상황에

대한 인식이 득세를 하는 바람에 의도치 않았던 가슴앓이만 하게 되는군요.

덕분에 오늘 집에까지 걸어온 12km보다 월씬 더 긴 심리적 여행을 하게 됩니다.

상춘하러 갔다가 가슴에 회한만 안고 돌아온 하루였네요. ㅠ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