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샘추위가 물러나자 날씨가 갑자기 좋아졌습니다.
더운 느낌마저 들 정도로 따사로운 햇살이 이끄는 대로 즉석 나들이에 나섰지요.
아무런 준비 없이 달랑 디카만 하나 들고 목적지도 없이 나선 길이니 나들이는 아니고
소요라고 해야 맞을 것 같네요.
발길 가는 대로 걷다 보니 동네 앞 야산을 내가 오르고 있군요.
지난 가을 이후 이 야산을 한 번도 찿지 않았다는 사실이 무의적으로 행선지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시간에 쫒길 일이 없으니 걸음걸이가 자연히 뒷짐 진 양반네 형국입니다.
한 중학교 교정에서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뭔가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복장을 보니 체육시간인 모양입니다.
표정들로 봐서는 욘석들이 체육시간을 공부로 인한 스트레스를 풀어낼 수 있는 휴식
기회 정도로 치부하고 있는 듯합니다.
햇살이 신기를 발휘해 이들을 즉석에서 꽃으로 현화(現化)시킵니다.
머리 위 하늘빛보다 더 맑고 산중 야생화보다 더 화사한 이 얼굴들을 내게 보여주고자
한 햇살의 의도를 짐작해보다가 아마도 햇살은 내게 인간이란 원래 악하지 않다는 성선설
신봉자인가 보다 하는 정도로 단상을 끊어냅니다.
내 얼굴이 그들의 얼굴에 중첩될 때의 이질감을 감당해낼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묘지군 옆으로 난 소로를 타고 천천히 산을 오릅니다.
언뜻 뭔가가 하늘거리는 것 같아 고개를 돌려보니 개암나무에 꽃차례가 드문드문 달려
있네요.
개암나무 꽃이 벌써 필 때가 되었나, 하는 생각 끝에 내가 근자에 일부 봄꽃들만 너무
편애했구나 하는 자책이 매달립니다.
외형에 따른 봄꽃 차별화가 내 안에서 나도 모르게 진행되고 있었던 거지요.
너도바람꽃이나 변산바람꽃, 복수초, 노루귀, 각시현호색 등의 야생화만 봄꽃이 아니라
나무에 핀 꽃도 봄꽃이고 화사한 꽃잎과 꽃술이 밖으로 확연히 드러나지 않았긴 해도
개암나무 꽃도 봄꽃입니다.
사죄의 손길을 가지로 뻗자 개암나무는 괘념할 필요 없다는 듯이 때마침 불어오는 미풍에
노란 꽃가루만 공기 중으로 분분히 날릴 뿐 전혀 서운한 내색을 보이지 않습니다.
작고 앙증맞은 암꽃차례가 해파리 촉수 같이 생긴 붉은 암술대를 이용해 금방이라도 이들
꽃가루를 걸러낼 것만 같습니다.
국외자의 무관심 속에서, 혹은 그 무관심을 이용해, 개암나무들은 발빠르게 1년이란 이름의
순환고리 출발점을 통과한 지 이미 오래입니다.
생명활동은 우리의 인식 여부와 무관하게 곳곳에서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걸 녀석이
극명하게 내게 설파하고 있습니다.
↓ << 개암나무 수꽃차례와 암꽃차례 >>
↓ << 수꽃차례에 알알이 박혀 있는 수술들 >>
↓ << 붉은 암술대를 내놓고 있는 암꽃차례 >>
걸으면서 보니 개암나무들 대부분이 이미 개화를 마친 상태네요.
개암나무처럼 긴 수꽃차례를 늘이고 있는 것 중에 물오리나무도 있지요.
녀석은 주로 위쪽 가지에만 무수한 꽃을 매단 채 내 디카의 접근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개암나무 아니었으면 고개를 들어 가끔 나무들 위를 쳐다볼 생각을 하지 못했을 터이니 이점
에서 물오리나무는 개암나무에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하긴 물오리나무야 사람을 포함한 뭇짐승들의 손쉬운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아래쪽 가지에는
꽃을 피우지 않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니 내가 개암나무에게 절을 하라 마라
강권할 일은 아닐 겁니다.
물오리나무 우듬지 위에 떠 있는 파란 하늘이 마음의 갈등은 애증만 유발할 뿐이니 평상심을
유지하는 게 바람직할 거라고 살짝 충고합니다.
↓ << 개화한 물오리나무 >> : 이전 사진 차용
↓ << 암꽃차례와 수꽃차례 >> : 이전 사진 차용
↓ << 수꽃차례 확대 사진 >> : 이전 사진 차용
↓ << 암꽃사진 확대 사진 >> : 이전 사진 차용
뿔 같은 꽃차례를 하늘을 향해 뻗고 있는 자작나무도 물오리나무처럼 낮은 가지에까지 꽃을
피울 생각은 없나봅니다.
아직은 덜 성숙한 꽃차례들이 무슨 미련이 그리도 크기에 아직까지 모체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지난해의 열매들과 밀어를 나누고 있습니다.
일년 후의 자신의 모습을 미리 봐버린 게 당황스러웠는지 새 꽃차례들은 고개만 주억거리며
묵은 열매가 전하는 지난 삶의 노정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듭니다.
↓ << 형성되고 있는 자작나무 꽃차례와 아직까지 매달려 있는 묵은 열매들 >>
↓ << 성숙 전 수꽃차례의 모습 >>
생강나무도 봄 산 치장 대열에 이미 가세했네요.
나무들 사이를 노릇노릇하게 물들이고 있는 생강나무 꽃들이 나만큼이나 간절하게 본격적인
봄의 도래를 재촉하고 있습니다.
생강나무는 암수딴그루입니다.
수그루에는 9개의 수술 중 3개의 수술에 작은 샘 모양의 돌기인 선체(腺體)가 달려 있지요.
경쟁을 피하기 위해 다른 수종들보다 먼저 꽃을 피움으로써 일찌감치 수분을 마치려는 전략
으로도 모자라 매개가 되는 곤충을 선점하기 위해 그 작은 수술대 위에 선체까지 매달아두는
세심한 배려까지 구비하고 있는 이 생강나무를 그저 미색 감상용으로만 여기기에는 그 진화
과정 상의 노력이 너무도 치열했군요.
생강나무 꽃을 바라보고 있자니 색채에 대한 연상작용 탓인지 뜬금없이 병아리가 생각납니다.
아, 그러고 보니 귀엽다는 게 둘의 공통점이군요.
나뭇가지 위에 핀 병아리라...
가끔은 말 같지 않은 표현이 가슴속에 아지랭이를 피웁니다.
오늘만큼은 꽃의 구조를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게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어 생강나무의 암수
구별 노력을 포기하기로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없이 찍어 온 사진 속에 암수꽃이 모두 다 들어 있네요. ^^)
이성보다는 감성으로, 지식보다는 느낌으로 살아보는 것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는 걸, 아니
어쩌면 그게 더 본질적인 건지도 모른다는 각득이 오래 전에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기 때문일
겁니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일도 가끔은 삶의 윤활유가 되는 거야, 라고 속으로 한 혼잣말을
바람이 몰래 전해줬는지 생강나무 가지가 이해의 표시인 양 살포시 몸체를 뒤척입니다.
↓ << 갓 피어나기 시작한 생강나무 >>
↓ << 수그루의 수꽃과 선체가 달린 수술의 모습 >>
↓ << 꽃 확대 사진 >>
↓ << 암그루의 암꽃 >> : 암술대가 길게 나와 있음. 암꽃이라고 해서 수술대가 없는 건 아니고 단지 퇴화되어 있을 뿐임.
양지바른 무덤가에서는 양지꽃 한 송이가 성급한 봄맞이에 열중입니다.
두어 시간의 간단한 소요를 마치고 하산을 하던 중 등산로 옆 안쪽 갈색 나무들 사이에서
이색이 감지돼 눈을 돌려보니 진달래입니다.
산이 이제까지 노란색 계열의 꽃들만 선보인 게 못내 아쉬웠는지 분홍색 꽃 하나를
마지막으로 선물하는 것처럼 느껴져 반색을 합니다.
몇 개 달리지 않은 진달래 꽃송이들은 오늘의 내 산책에 화룡점정 역할을 해내기라도
하려는 듯 꼭 용의 눈동자만 하다고 생각되는 크기의 꽃을 피우고 있네요.
안달해봐야 오지 않을 봄이 오는 건 아니듯이 포기하고 있어도 와야 할 봄은 기어이 오고야
맙니다.
춘색이 점점이 박힌 산처럼 화색이 점점이 물든 마음으로 산을 내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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