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하늘과 대지의 경계를 지우던 빗줄기가 아침이 되니 잠시 소강상태에 들었습니다.
베란다에 나서 담배 한 가치를 꺼내 불을 붙입니다.
하늘은 흐리지만 공기는 맑은지 뿜어낸 담배연기가 흩어지는 궤적이 선명합니다.
또 다시 비가 흩뿌리면 바람을 타고 창틈을 비집고 들어오려는 비로 인해 담배 피우기가 힘들 거라는 생각에 담뱃갑으로 손이 갑니다.
한 대 더 피울까 하다가 그만둡니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제법 빠른 속도로 흐르고 있습니다.
먹구름들은 출전하는 편대처럼 군데군데 모여서 대열을 흩트리지 않은 채 한 곳을 향해 이동합니다.
상대적으로 잿빛이 옅은 구름이 가교처럼 그 사이사이를 이어주고 있습니다.
구름의 색깔이 그 아래 지역의 강우 여부를 결정합니다.
도화지 같은 하늘에 산재한 잿빛의 농담(濃淡)이 강우량을 결정합니다.
창밖으로 내민 손에 빗방울이 듣습니다.
아파트 바로 위 하늘에 옅은 잿빛 구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최근 며칠 간 지루한 장마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의 날씨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빗소리와 함께 아침이 열리고 비가 허공에 그어대는 사선으로 밤의 빗장이 잠기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던 듯합니다.
특징적인 것은 비가 단속적(斷續的)으로 내린다는 겁니다.
그 파상공세 전략에 속아 반짝 해가 고개를 내밀 때 비로 인한 영어(囹圄) 신세에서 잠시 해방되어 보겠다고 산책을 나갔다가 흠뻑 젖은 채로 돌아온 일만도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지금도 하늘은 상당 시간 동안 공세를 중단하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유혹합니다.
이전의 그 두 번의 경험이 간단히 그 간계를 간파하고 유혹의 틈입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어젯밤에 거센 빗줄기를 피해 내 보금자리로 뛰어들었던 시간들은 풀어놓았던 추억담을 모두 수습해 이 아침 다시 제 자리를 찾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습니다.
막상 시간과 대면하고 보니 난 반추해야 할 추억들을 그다지 많이 갖고 있지 않다는 걸 느꼈습니다.
지난 세월에 점재해 있는 온갖 기억의 편린들은 모자이크처럼 합성되지 못한 채 공간 속을 혼백처럼 떠돌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실체를 찾아 손을 내밀어 보았지만 그 그물에 걸릴 것 같던 기억은 실루엣이 되어 교묘하게 포위망을 벗어납니다.
결국 새벽 5시경까지 잠 못 이루고 했던 그 놀이는 내게 심한 피로감만 남겼습니다.
그래서 담배가 이리도 썼나 봅니다.
드디어 빗줄기의 총공세가 재개된 듯합니다.
눈앞의 공간이 무수한 물방울들로 채워지더니 뒤 이어 하늘이 어두워집니다.
선전포고를 후치시킨 기습입니다.
이렇게 비가 내릴 때면 난 거의 항상 어느 한적한 산자락 아래 외딴 곳에 위치한 카페를 상상합니다.
카페는 한 쪽 벽면 전체가 통유리로 되어 있습니다.
고사한 나무를 잘 다듬어 만든 탁자와 푹신푹신하지는 않아도 등받이가 있는 의자가 창가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내 옆에 사랑하는 연인이나 오래된 친구는 없어도 탁자 위에는 탁주가 담긴 노란 양은 주전자와 술잔이 놓여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먹을거리가 그 테이블의 한 공간을 차지한 적은 거의 없습니다.
연관된 추억이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런 상상이 항상 비를 따라다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그런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어서 우중에 훌쩍 집을 나서고 싶은 충동이 무수히 일었었지만 그 충동이 실제로 내 몸을 집 밖으로 내몬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마음만 시간과 공간 어디쯤까지 둥실 떠오르다가 황급히 제자리로 돌아오곤 합니다.
언제, 어디서인지는 기억하지 못해도 인류 최초의 감옥에 대한 만화인가 삽화인가를 본 적이 있습니다.
한 원시인이 다른 원시인들 주변 땅바닥에 우연히 원을 그려놓으니 그 안에 있는 원시인들이 감히 그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안절부절 못하더라는 내용입니다.
원을 이루고 있는 곡선이 원시인들의 발걸음을 물리적으로 제어할 수는 없으니 그 만화인가 삽화인가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그건 당연히 심리적인 감옥이 될 겁니다.
지금 창 밖에 내리는 비는 물리적, 심리적 감옥의 속성을 모두 일정 부분 보유하고 있습니다.
밖으로 나돌기가 어려우니 몸은 실내에 갇히고 마음도 자꾸 내면 깊숙히 가라앉습니다.
이 비가 야생에 있는 풀꽃나무들에게는 과연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건지 갑자기 궁금해집니다.
감옥이란 자유로운 이동의 제한을 의미하는 건데 그런 건 식물의 본질에 속하니 이 비가 그들에게 감옥이 될 까닭은 없겠지요.
그들은 이 비가 암시하는 자연의 권고를 따라 한 계절을 마무리하느라 여념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개화시기를 늦게 배정받은 식물들은 충분한 수분의 공급을 은혜처럼 활용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요.
비가 그치는 대로 그들 각자의 반응 결과를 확인해 보러 산에 가봐야겠다는 욕구가 가슴 한 편에 들어와 좌정합니다.
오늘 같은 날이면 으레 소위 "파전에 빈대떡"이 그려지는 걸 보면 나도 평범한 뭇 사내의 범주는 죽어도 벗어나지 못할 운명인가 봅니다.
마음 언저리에 숨겨져 있던 덩굴손이 재빠르게 냉장고 문을 열고 맥주병을 휘감습니다.
그렇지만 한낮의 전반부에 머물고 있는 시간이 그 덩굴손을 무참히 잘라내 버립니다.
문득 한시 하나가 생각납니다.
평소 현학적으로 보일 필요가 있을 때 써먹으려 외우고 있던 건데 한 번도 써먹어보지 못하다가 막상 현학적으로 보이지 않아도 되는 이 상황에 하필 그 한시가 뇌리에 떠오릅니다.
아마도 제지당한 음주욕구에 대한 대리만족 현상인가 봅니다.
양인대작산화개
일배일배부일재
아취욕면군자거
명조유의포금래
술과 꽃과 음악과 풍류가 적절히 어우러진 이 정경은 머릿속에 긴 여운 대신 짙은 아쉬움만 남깁니다.
심심파적으로 화면에 윈엠프를 띄우고 재생버튼을 클릭하려다 몇 가지 음악을 먼저 선곡합니다.
날씨에 어울리는 곡들을 고른다는 것이 단순하게도 제목에 주로 "비"나 "Rain"이 들어있는 것만 결국 윈엠프에 올려놓았습니다.
며칠 동안 비가 실어다 준 자연의 음악에 식상해서인지 인간의 성대와 악기가 화합하여 만들어낸 선율이 편안하게 가슴을 적십니다.
내 취향이 그러한지 그 중에서도 양혜승의 "Rain"과 루다의 "Sad paradise"란 가요가 귓전에 오래 머뭅니다.
둘 다 음색이 그다지 밝진 않습니다.
예전에 잡식성이었던 내 취향은 언제부터인가 이런 음악만을 편식하고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이루어진 이런 변화는 아마도 내 곁을 스친 세월이 남긴 잔재의 일부이겠지요.
이제까지의 시간이 폭 넓은 강물이었다면 요즘의 시간은 여울목을 빠져나가려는 물살입니다.
하루가, 일주일이, 한 달이, 일 년이 흘러가는 걸 순간순간 인식하지를 못합니다.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인지는 언제부터인가 사후의 회억 영역 안에서 주로 이루어집니다.
내가 야생화에 눈을 돌리게 된 것도 어쩌면 그들로부터 초연과 순응의 지혜를 배워보고자 하는 잠재의식적 희망에 기인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들 스스로가 합의한 비에 대한 감상에 갇힌 사람은 나뿐만이 아닌 모양입니다.
심심치 않게 휴대폰이 딩동거려 폴더를 열어보면 액정화면에서 지인들의 메시지가 더듬이를 쑥 내밉니다.
더듬이는 여지없이 오늘이 한 잔 할 호기가 아니냐며 내 의사를 타진합니다.
그 한 잔이 얼마나 긴 꼬리를 감추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지난 경험이 이제까지 나를 구속하고 있다고 느꼈던 그 원 안으로 오히려 나를 밀어 넣습니다.
같은 구속이지만 이제 타의에 의한 구속은 자발적인 구속으로 바뀝니다.
지인들이 내민 더듬이에 그냥 미안하다는 말을 매달아 되돌려 보내고 맙니다.
이럴 때는 내가 교통사정이 그다지 좋지 않는 한적한 시골 같은 곳에 칩거하고 있다는 사실이 도움이 됩니다.
막상 나가자니 오며 가며 길바닥에 버릴 시간들이 내게 얼른 손사래를 칩니다.
옛날 은자들도 혹시나 이런 연유에서 깊은 산중에 거처를 마련한 건 아닌가 하는 건방진 비교가 잠시 머리를 스칩니다.
어느새 하늘은 또 다시 표정을 바꾸었습니다.
심지어 하늘은 누군가에게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한 세심한 배려이기라도 한 듯이 터진 구름 틈새로 햇살까지 몇 줄기 흘리고 있습니다.
아파트 공사 현장 양 옆을 흐르는 냇가를 도도히 흐르던 흙탕물도 순식간에 줄어들었습니다.
이래서 우리 동네 하천은 건천입니다.
덕분에 홍수나 침수 걱정은 없지만 그 대신 평소 맑은 물에 갖가지 물고기들이 유영하는 풍광은 기대하지 못합니다.
문득 평소 내가 사진 찍을 거리라도 있지 않을까 해서 찾던 모래사장에 있던 식물들의 안위가 궁금해집니다.
혹시나 내가 이름을 불러주기도 전에 그들은 급류에 쓸려 먼 길을 떠난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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