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의 뿔이 아닌 눈 내리는 하늘의 구름처럼 혼자 가는 여인이시여, 그대는 누구인가요?
산행 내내 눈은 이 깊이를 유지했습니다.
오는 길에 여주휴게소에서 산 스패츠(Spats)가 고맙게도 제 역할을 충실히 해줍니다.
스패츠 착용은 처음 해보는데 신발 속으로 눈이 들어오지 않으니 정말 좋습니다.
재질이 무엇인지 외부에 어떤 처리를 했는지 모르겠으나 눈이 겉에 달라붙지도 않습니다.
지난해 말 연인산과 화악산을 혼자 등산하면서 신발 안으로 침투한 눈으로 인해 양말이 모두 젖어 무지 고생했던 기억이 새롭네요.
한참을 내려가다 만난 평지는 이미 다른 산악회 회원들이 점심식사터로 점유하고 있더이다.
이곳을 그냥 지나쳐 선두가 물색해 놓은(혹은 놓을) 적당한 장소로 향하기 위해 왼편에 나 있는 소로로 접어 듭니다.
등산로 주변의 나무들이 먼 기억의 속삭임 같은 교태로 자꾸만 내 발길을 붙잡아 나도 모르게 디카를 꺼내 들게 합니다.
마침 진로를 방해받을 등산객도 주변에 없어 마음 놓고 각도까지 잘 조절해 가며 연신 셔터를 눌러댑니다.
나무들은 제각각 현란하고도 은근한 자태로 포즈를 취해 줍니다.
그래 산에 와서 너희들 모습을 망막이나 필름에 새기지 않으면 무슨 맛으로 산엘 오겠니.
점심이야 좀 굶더라도 마음만 풍족해진다면 그것으로 족하리.
선두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곳에 도착하여 선 채로 간단한 점심식사를 합니다.
걷기를 멈추니 기다렸다는 듯이 체열이 식어갑니다.
그래도 오늘 함백산은 우리의 표정에서 긴 버스여행에 대한 피로를 읽어냈는지 그걸 보상이라도 하듯이 겨울답지 않게 포근한 날씨를 내어줍니다.
바람도 별로 없고 해서 산행 내내 추위와 싸울 일은 없었습니다.
공터 옆에 서 있는 보호수 한 그루가 식사 내내 우리를 내려다 봅니다.
온몸에 흰 눈을 이고 있는 주목의 모습에서 함백산 주목군락지의 끝 부분인 아 자리를 긴 세월 동안 굳건히 지켜내 온 자랑스러운 초병의 당당함이 묻어납니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길을 떠납니다.]
앞서 간 사람들의 발자국이 가야 할 길을 알려주지 않더라도 함백산에서는 길을 잃을 염려가 거의 없습니다.
갈림길이 거의 없어 굳이 방향을 가늠하지 않고 길만 따라가더라도 큰 무리가 없습니다.
이 길에서도 눈과 나무가 합작으로 만들어낸 설경의 향연은 그치질 않습니다.
중함백은 어디인지도 모른 채 걷다 보니 전망대 하나가 나타납니다.
눈 덮힌 바위 위에 조심스럽게 올라 산 아래 풍경 한 장 찰칵해봅니다.
터진 구름 사이를 비집고 나온 햇살이 먼 풍경에 광도를 높여주는 호의를 베풀지만 흐린 날씨가 그 배려를 무색캐 합니다.
급기야 어디선가 몰려든 안개가 점점 풍경을 잠식해 들어옵니다.
그만 일행들이나 따라가라는 암시인가, 원......
뒤 이어 나타난 경사면에서도 안개는 전 풍경의 독식을 극도로 경계합니다.
알았다, 알았어. 지금 신비주의 전략을 펼치고 있는 중이라 이거쥐?
제2쉼터에 이르자 하늘은 비로소 심술을 다소 누그러뜨립니다.
눈앞에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풍경이 펼쳐집니다.
상록수 하나 없이 낙엽수만으로 이루어진 겨울 산이 언제부터인가 좋아졌거든요.
다소 흐릿하기는 하지만 중첩된 산들의 능선이 만들어낸 선들이 시원하기만 합니다.
제1쉼터에 이르는 길에서는 주목군락 대신 심심치 않게 나타나는 조릿대 밭이 산객들을 영접합니다.
오늘의 마지막 봉우리인 은대봉에서 일행 몇 분이 잠시 발걸음을 멈춥니다.
난 감기가 너무 심해 숨쉬기조차 어려워 늦었지만 여기서 감기약 한 알 먹기로 합니다.
여기서부터 두문동재를 지나 두문동재터널까지는 줄창 내리막입니다.
나뭇가지에 핀 설화가 바람의 방향을 말해 줍니다.
그 바람이 오늘은 구름 뒤에서 휴식 중이라 우리는 등산하면서 자라목을 해야 할 일이 거의 없습니다.
회장님과 총무님(?)이 가던 길을 멈추고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지나면서 들으니 회장님은 휴대폰으로 풍경 찍는 중이고 총무님은 어딘가로 문자를 보내고 있는 중인 것으로 보입니다.
혹시 둘이 수상한 사이면서 내가 곁을 지날 때 짐짓 딴 청을 부린 건 아닌가? ㅎㅎ
두 분의 휴대폰 액정에 비추었던 풍경을 난 디카에 담아봅니다.
음... 제법 구도가 괜찮네....
아무리 훌륭한 풍광이라도 보는 시간이 길어지면 그 효과가 반감하나 봅니다.
은대봉을 지나서부터는 디카를 꺼내 들 필요성을 그다지 느끼지 못 한 채 마냥 걷기만 합니다.
저 숲을 벗어난 지점으로 내려서니
"백두대간두문동재"라 쓰인 키 큰 표지석이 오늘의 산행이 여기서 끝났음을 알립니다.
그렇지만 쌓인 눈으로 차량 통행이 어려워 여기서부터 일반도로를 따라 버스가 주차해 있는 곳까지 걸어야 합니다.
고개 한편에 있는 화장실 옆에 돌탑이 몇 개 쌓여 있습니다.
하산 기념으로 쌓아 놓은 건가? 아니면 쾌변 기원을 위해 쌓아 놓은 건가?
누군가의 표현대로 그리움의 간격으로 도열해 있는 자작나무들의 환송을 받으며 도로를 내려옵니다.
도로는 생각보다 깁니다.
한참을 내려왔는데 여전히 도로위입니다.
더군다나 노면이 상당히 미끄럽습니다.
고스란히 바람에 노출되어 단단히 얼어 붙은 길 위를 눈이 덮고 있는 형국이어서 발걸음이 산에서보다 훨씬 더 조심스러워집니다.
눈 사이로 노출된 빙판을 보니 잘 손질한 거울 같습니다.
혼자서 외줄도 아닌 대지 위에서 손으로 균형을 잡는 광대놀이를 몇 번 하다가 결국은 한 번 콰당탕 하고 말았다는 거 아닙니까.
버스가 주차해 있는 곳에 도착합니다.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두 사람의 뒷 모습을 어디선가 본 것만 같아 일단 디카에 담아 봅니다.
소리 없이 내리는 가는 눈발이 사진 속에 추억의 잔재처럼 박힙니다.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저 모습은 바로 혼자 산행을 즐기는 내 모습이라는 정답 금세 떠오릅니다.
타인의 눈 속에서 나도 저들처럼 외로운 뒷태로 가물거리리라 생각하니 괜스레 가슴에 잔물결이 입니다.
그래도 단독산행은 나름대로 산악회 산행과는 다른 묘미를 가지고 있으니 그만둘 수 없다는 오기 같은 게 그 잔물결 뒤에서 파고를 더 높입니다.
산악회에서는 하산 후 식사에 곁들여 과메기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과메기가 산중에까지 나들이를 하여 한때 몸담았던 바다의 풍미를 혀에 전해줍니다.
돌아오는 버스 내에서는 과메기와 같이 마신 하산주의 취기와 산행의 피로감이 겹쳐 혼곤한 잠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문득 잠에서 깨니 백설이 지배하던 시야에 야음이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기억상자를 뒤져 낮에 본 설경을 되새김질이나 해볼까 생각하며 다시 눈을 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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