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에 베낭도 없이 간단한 복장으로 산책 삼아 복두산을 찾았다.
들머리가 여러 군데인데 오늘은 최근에 가보지 않았던 오남중학교 뒤 쪽 코스를 이용하기로 한다.
학교 건물 뒤로 돌아서니 가장 먼저 귀룽나무가 환영인사를 한다.
귀룽나무는 가지가 많고 수형이 둥그스름해서 잎만 달고 있어도 풍성해 보이는데 하얀 꽃까지 잔뜩 곁들이고 있으니 보는 눈이 즐겁지 않을 수 없다.
요즘은 어딜 가나 귀룽나무가 만개한 모습이 눈에 띈다.
들머리로 이어지는 소로를 걷다가 산으로 들어서기 전에 우선 좌측에 있는 묘지에 먼저 들린다.
이상하게도 언제부터인가 묘지만 나타나면 한 번 들려보고 싶은 충동이 인다.
이전에 묘지 주변에 형성된 초지에서 이런저런 새로운 식물들과 조우한 경험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산을 오르면서도 등산로 초입에 있는 묘역 네 군데를 들려봤지만 특별한 식생은 발견되지 않는다.
제비꽃, 양지꽃, 조개나물, 둥굴레, 쇠뜨기, 할미꽃, 각시붓꽃, 꿩의밥 등등이 자라고 있었지만 모두들 이미 내 컴퓨터 폴더에 그 영상들이 저장되어 있는 것들이다.
나무들로는 산뽕나무, 노린재나무, 팥배나무, 서어나무, 산딸기, 일본잎갈나무, 밤나무, 참나무류 등이 자라고 있다.
서어나무와 참나무는 숲의 천이과정에서 극상림을 구성하는 나무들이라고 하는데 이 산에는 유독 서어나무와 참나무가 많다.
그렇다면 이곳도 이미 극상림 상태에 들어섰다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극상림이란 나무들 간의 경쟁상태가 마무리되어 전체적으로 수종과 개체수가 더 이상 크게 변하지 않는, 안정된 숲을 말한다.
사초가 하나 눈에 띈다.
사초는 종류도 많고 동정하기가 까다롭기 때문에 가능하면 못 본 척 하곤 하는데 오늘은 한 번 눈길을 주기로 한다.
가늘고 길어서 사진 찍기도 쉽지 않다.
땅바닥에 털퍼덕 주저앉아 열심히 촛점을 맞추고 있는데 인기척이 있어 뒤돌아보니 노부부가 베낭을 매고 올라오면서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본다.
행색으로 보아 그 둘은 산나물을 채취하기 위해 입산한 것으로 보인다.
등산로를 벗어나 숲 속으로 난 소로로 접어들어서도 뒤돌아보는 표정이 왜 그렇게 영양가 없는 일을 하고 있냐는 투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진 찍는데 다시 집중을 한다.
볕이 좋아서인지 생각보다는 찍힌 사진이 내 마음에 흡족하다.
내 실력에 이 정도면 됐지 뭐.
나중에 조사해 보니 실청사초다.
줄기 끝에 있는 것이 수꽃이삭이고 그 아래 달린 두 개가 암꽃이삭이다.
천천히 걸으면서 나무마다 자세히 살펴보는데 한 나무에 낯익은 꽃이 달려 있는 게 보인다.
작년에 어디선가 분명히 본 건데도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마도 오디가 열렸더라면 단번에 알아봤을 이 나무가 바로 산뽕나무다.
산뽕나무는 암수딴그루인데 가끔 암수한그루이기도 한 나무로 사진 속 꽃은 암꽃이다.
하산하다가 운이 좋게도 동네 어귀에서 산뽕나무 수꽃도 만날 수 있었다.
언젠가 식물 탐사 기행 관련 책을 하나 낸다면 제목을 "나는 꽃으로만 살지는 않으리"로 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식물에게 있어서 꽃은 하나의 기능에 불과하지 장식은 아니다.
잎이며 줄기며 가지며 열매며 모든 게 그들에게는 필요한 존재들인데 우리는 꽃에만 너무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는 걸 함축적으로 표현한 제목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말만 그렇지 실제로는 나도 범속한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나 보다.
저 산뽕나무의 수꽃을 만나고서도 이것이 무슨 나무의 꽃인지를 몰랐다.
나중에 집에 와서야 이것도 산뽕나무의 꽃이란 걸 비로소 알았으니 좀전에 암꽃을 만났을 때 잎과 수피의 사진도 같이 찍긴 했지만 단지 사진만 찍었지 관찰 노력은 없었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오르막 중간 쯤에 작은 습지가 하나 있다.
올초에도 갯버들과 키버들의 차이를 알아보기 위해 몇 번 들렸던 곳이다.
작년 이맘 때쯤 그곳에 머위가 몇 개 펴 있었던 기억이 나서 가봤는데 머위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혹시 나물 채취꾼들의 손에 모두 희생된 건 아닌지 모르겠다.
지난 해 폭풍우에 쓰러진 일본잎갈나무가 등산로를 가로지른 채 누워있는데 허리를 숙여 그 밑으로 지나가다 보니 쓰러진 나뭇가지에서도 잎과 꽃이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뿌리 채 뽑혔는데 땅과 맞닿은 일부 뿌리가 아직은 땅속에서 제 역할을 다 해내고 있는 모양이다.
일본잎갈나무는 가지가 약해서인지, 아니면 그것도 모종의 전략인지 바람에 가지 전체가 쉽게 탈락한다.
대개는 잎이나 꽃이나 열매만 떨어지는데 이 녀석은 그렇지가 않다.
혼자는 외로워서인지 꼭 자기가 붙어 있던 가지까지 동반하려 한다.
옹기종기 모인 애기나리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무슨 생각을 저리도 골똘히 하고 있는 걸까?
오늘의 반상회 주제가 궁금하다.
큰애기나리와 금강애기나리는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기본종 이외의 것을은 개체수가 적은 건지, 아니면 특정 지역에만 모여 사는 건지 발견하기가 참 어렵다.
며칠 전 선밀나물을 만나 좋다고 사진을 찍었는데 알고 보니 선밀나물은 암수딴그루란다.
그 사실을 안 후 산에서 선밀나물만 보면 꽃을 유심히 살폈는데 오늘 드디어 그 암꽃이 눈에 띄었다.
암꽃은 귀한 건지 오늘 만난 대부분의 선밀나물은 수그루였다.
청미래덩굴은 나무로 역시 암수딴그루인데 눈에 든 건 수그루였다.
청미래덩굴과 청가시덩굴은 청주 근무 시절 우암산에서 처음 본 건데 그때 그 둘의 구분법을 익혔으나 둘의 이름이 비슷해서 항상 혼동하곤 했었던 추억이 있는 녀석이다.
청미래덩굴의 잎은 둥글 넓적하고 청가시덩굴의 잎은 길쭉하고 끝이 뾰족하다.
어떤 지방에선가 망개떡을 만들 때 쓰는 잎이 바로 청미래덩굴의 잎이다.
그래서 청미래덩굴은 일명 망개나무라고도 한다.
그보다는 그 지방에서는 청미래덩굴을 애초부터 망개나무라 불렀고 그 나무의 잎을 이용하여 만든 떡을 망개떡이라 불렀다는 설명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능선 위로 올라섰다.
능선을 따라 우측으로도 묘지가 많이 조성되어 있다.
거기도 들려보기로 한다.
작년에 그곳 중 한 군데에서 열매를 맺고 있는 이름 모를 자그마한 풀 하나를 보았는데 도무지 정체를 모르고 있다가 블로그에서 누군가가 댓글로 애기풀이라고 알려줬던 일이 있었는데 혹시나 그 풀이 지금도 있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오늘은 운이 좋은 건지 그 풀이 무덤가 잔디 사이에서 꽃을 피운 채 서 있는 걸 발견했다.
이름이 시사하듯이 애기풀은 크기가 작은 편이다.
하긴 이보다 훨씬 더 작은 식물도 적지 않다는 걸 감안하면 애기풀이란 이름이 어색하기는 하다.
그렇지만 어쩌랴, 이름은 먼저 지은 사람이 임자인 걸.
이름은 풀이고 키도 작지만 그래도 초본성 반관목이란다.
어쨌거나 줄기에 매달린 홍자색 꽃이 귀엽기 그지없다.
어쩌면 키가 작아서 애기풀이 아니라 꽃이 애기처럼 귀여워서 애기풀인지도 모르겠다.
근처에 흰제비꽃이 여럿 있기에 디카에 담았다.
이제까지는 흰젖제비꽃만 찍었지 흰제비꽃은 처음이다.
그래도 제비꽃이나 흰제비꽃은 잎 모양이 특징적으로 생겨 쉽게 구분이 가니 제비꽃 종류치고는 아주 마음에 드는 것들이다.
능선을 따라 제1봉에 이르기까지는 참나무들이나 관찰하면서 천천히 걸었다.
도토리를 맺는 대표적인 참나무로는 떡갈나무, 신갈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굴참나무, 상수리나무의 6가지가 있다.
작년에 이들을 잎과 수피만으로 구별하는 법을 나름대로 정립하는데 근 반 년 이상 고생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런 고생 덕분에 지금은 나무만 보면 어느 정도 감이 잡힌다.
참나무 군락 군데군데에서 자라고 있는 노간주 나무도 그냥 지나치려다 한 번 신경 써서 관찰해 보니 자잘한 수꽃을 잔뜩 매달고 있다.
아직은 꽃망울 상태인데 조만간 저들도 꽃을 활짝 피울 것이다.
소수이긴 하나 이미 꽃을 피운 것도 몇몇 눈에 띈다.
리기다소나무의 수꽃이삭은 노란색과 붉은색 두 개가 보인다.
자료에는 수꽃의 색을 황자색이라고만 해놓았는데 노란색이 나중에 붉은색으로 변하는 건지는 좀 더 관찰이 필요하다.
참나무들 밑에 있는 풀밭에서 피어난 각시붓꽃 하나가 눈에 띄였는데 아무리 봐도 이전에 봤던 것들과는 좀 달라 보인다.
혹시 그렇게도 학수고대했던 난장이붓꽃이 아닌가 하고 살펴봤는데 과연 그랬다.
난장이붓꽃은 각시붓꽃과 유사하나 꽃이 필 때 꽃대가 잎보다 더 길고 포에 붉은빛이 돈다고 하는데 그 설명과 실물이 일치했다.
단지 잎은 하나밖에 없던데 그것도 난장이붓꽃의 특징인지는 모르겠다.
대부분의 노린재나무는 꽃망울 상태였는데 유독 한 나무만 가지 아랫 부분에 꽃을 피워놓았다.
위치상으로 볕이 좋은 곳인데 아무래도 일조량하고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꽃잎 밖으로 길게 뻗은 수술의 모습이 머리서 보면 멋을 더한다.
가까이서 보면 노란 꽃밥이 시각에 즐거움을 더해 준다.
정상 근처에 쉬기 좋은 바위 하나가 있는데 그 옆에서 자라고 있는 세 그루의 팥배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다.
다른 팥배나무들은 아직 꽃망울도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했는데 유독 이곳의 나무들만 일찌감치 개화를 한 것도 역시나 위치상 볕이 좋은 곳이기 때문이리라.
내려가서 긴잎팥배나무나 털팥배나무인지 조사하 보려다가 그 밑에서 혼자 독서하고 있는 여자분이 있기에 그냥 포기하고 만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쉽게 올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낮은 곳이긴 하지만 복두산 봉우리 중에서는 그런대로 시야가 좀 트인 곳이다.
저 멀리 복두산과 천마산이 보인다.
하얀 구름들이 그 산정에 머물면서 신호등에 걸린 차처럼 잠시 쉬어간다.
공기도 맑고 바람도 시원하니 어느새 녹음이 짙어가고 있는 산세가 싱그럽다.
그렇게 나도 산의 일부로 고요히 머물다가 발걸음을 옮긴다.
하산은 다른 쪽 길로 하기로 한다.
내려오는데 덩굴꽃마리와 참꽃마리가 배웅을 나왔다.
참꽃마리는 꽃마리처럼 꽃차례가 말려 있지 않고 꽃이 훨씬 더 크다.
간단한 산책 수준의 산행이었지만 이리도 많은 봄꽃들과 만난 걸 보면 봄도 상당히 깊어가고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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