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까지 비가 내려서인가 공기가 청량하다.
덥지도 춥지도 않으니 산행하기에는 딱인 날씨이다.
날씨가 우호적이니 걷는 발걸음이 가볍다.
발걸음이 가벼우니 마음도 괜스레 구름인 양 무게를 슬쩍 빼낸다.
최근에 이 산 저 산 다녀본 경험이 지금은 산에 가봐야 특별한 야생화를 만날 수 없으리라 경고를 발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야생화가 없으면 등산만 해도 되니 별 문제는 없다.
들머리에서부터 새모래덩굴이 눈에 띈다.
며칠 전 다른 산 초입에서 보았을 때는 꽃봉오리가 완전히 벌어지지 않았었는데 이곳의 새모래덩굴은 꽃을 활짝 피운 뒤끝이라서인지 마치 만면에 미소를 띈 새색시 같다.
열심히 여러 컷을 찍었지만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만개한 꽃을 찍은 건 좋았지만 디카에 담긴 건 수꽃들뿐이었다.
새모래덩굴은 암수한그루라는 걸 또 잊은 것이다.
별 수 없이 암꽃을 찍기 위해 다음에 다시 새모래덩굴에게 내 변변치 못한 얼굴을 디밀어야 할 것이다.
아쉽긴 하지만 자학할 필요까지야 없겠지.
내가 어차피 컴퓨터가 아닌 바에야 그 많은 식물들에 대한 정보를 모두 머릿속에 입력하고 다닐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산딸기가 하얗게 핀 덤불 사이로 무덤 하나가 보이기에 가보기로 한다.
무덤가에서 간혹 괜찮은 식물들을 만난 경험이 그 유혹을 좀처럼 떨쳐내지 못하도록 나를 단속하고 있는지 무덤만 나타나면 한 번 들려보곤 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 동안 다른 곳에서 보았던 조개나물, 제비꽃류, 꿩의밥 정도 이외에 특별한 건 없었다.
대신 근처에 아까시나무가 벌써 하얀 등 같은 꽃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올해는 처음 대면하는 꽃이니 반갑게 인사를 나누지 않을 까닭이 없다.
아까시나무는 기본종과 꽃아까시나무라는 것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민둥아까시나무라는 것도 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그렇지만 그거야 자생하는 나무가 아니고 식재용인데다 꽃도 피지 않는다 하니 그냥 잊어버려도 될 듯하다.
들머리에 있는 사방오리는 이미 열매를 맺어가고 있다.
근처의 철쭉도 이미 다 졌고 먼저 꽃을 떨군 진달래와 같이 열매 맺기에 진력하고 있다.
지금 한참 결실 과정에 돌입한 풀꽃나무들이야 얼마든지 많겠지만 오늘 내 눈에 띈 것은 사방오리와 진달래, 철쭉 이외에 애기나리, 처녀치마 정도에 불과했다.
그 흔한 제비꽃들도 어디론가 다 사라져버렸는지 도통 시야에 잡히지를 않는다.
어딘가에서 열심히 씨앗을 퍼뜨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가루받이 이후의 꽃이란 식물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장애물이 되는가 보다.
낙화는 수분 후 씨앗 만들기 이외의 일에 역량을 분산시키지 않기 위한 목적 이외에도 포식자의 눈을 피하기 위한 의도까지 내포하고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한때는 인간의 사고나 식물의 의도나 결국은 맥을 같이 한다는 사실이 어색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참회나무는 그래도 아직까지 개화기를 접지 않았다.
꽃이 작고 녹색인지라 신경 쓰지 않고 걸으면 놓치기 쉽다.
참회나무 꽃을 잠시 관찰하고 돌아서려는데 경사면 아래쪽에 흰 꽃을 매단 나무가 하나 눈에 띈다.
오다가 보았던 가막살나무나 노린재나무 중 하나이겠거니 했는데 눈여겨 보니 꽃 모습도 다른데다 꽃이 핀 방향도 달랐다.
가막살나무나 노린재나무는 꽃이 위를 향해 피는데 이 녀석은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다.
당연히 디카를 꺼내 들고 곁으로 다가갔다.
물론 나중에 알았지만 고광나무 종류였는데 잎자루에 긴 백색 털이 있고 꽃자루와 꽃받침통에 털이 있는 점이 도감의 설명과 일치하여 흰털고광나무로 동정하였다.
고광나무는 작년에 국립수목원에서 한 번 본 후 처음이다.
갑자기 이런 나무가 동네 산에도 살고 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진다.
언뜻 보니 잎 밑 약간 위에서 세 개의 세로맥이 뻗어나가 잎 끝으로 모인다.
꽃은 총상꽃차례에 피는데 마치 깃꼴겹잎처럼 달려 있다.
이 특징만 잘 기억하고 있어도 나중에 고광나무를 만나면 이름을 불러주는데 망설임이 없으이란 기대를 제발 내 빈약한 기억력이 배신하지 말아야 할 텐데.
봉우리 하나를 지나 안부로 내려서는데 산딸기 꽃이 제법 싱싱하다.
대부분의 산딸기 꽃은 꽃잎이 너덜너덜해서 그다지 산뜻하지 않은데 이 녀석은 갓 피워낸 꽃인지 자태가 제법 반듯하다.
그런데 잎을 보니 깃꼴겹잎이네.
산딸기는 홑잎으로 잎몸이 갈라져 있다는 걸 알기에 이건 아마도 내가 아직 그 특징을 모르고 있는 많은 딸기 종류 중의 하나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열심히 셔터를 눌러댔다.
나중에 알고 보니 허망하게도 그건 딸기 종류가 아니고 찔레꽃이었다.
아, 이런, 이 정도 눈썰미 가지고서야 어찌 이 험난한 식물 공부를 제대로 해낼 수 있을런지.
안부에 내려서 복두산으로 오르는 급경사로로 들어서기 전에 왼편에 있는 이름 모를 절 쪽으로 잠시 내려가 보기로 한다.
작년 이맘때쯤 그곳에서 금난초와 은난초를 보았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풀밭을 조심스럽게 헤치며 돌아다니는데 박새와 여로, 말나리 종류의 잎만 눈에 든다.
한 곳에 이르니 겨냥했던 녀석들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아직은 모두 꽃을 피우지 않은 상태이다.
간신히 꽃을 피운 것 하나를 발견한다.
꽃색이 흰색이니 일단 금난초는 아니고 은난초 종류인데 은난초인지 꼬마은난초인지 은대난초인지는 모르겠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이 셋은 아마도 잎의 갯수에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어 일단 잎을 세어 보니 9개 정도가 된다.
사진은 한참 찍긴 했는데 집에 가서 보니 찍어 간 사진만으로는 은난초인지 은대난초인지 구분이 안 간다.
꼬마은난초는 잎이 1~2개이고 꽃잎이 벌어지니 바로 알아볼 수 있지만 은난초와 은대난초는 둘 다 꽃잎이 완전히 벌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잎의 갯수도 차이가 나긴 하지만 잎 같이 생긴 포도 있어서 내가 세어본 잎의 갯수에 포도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 둘을 구분하는 요점은 은대난초는 첫 번째 포가 꽃대보다 길다는 점이니 다음에 다시 가서 확인해 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이렇게 힘들게, 그리고 세밀하게 사진을 찍어가도 허사인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도 식물 공부 의욕 저하 요인 중의 하나다.
다시 발길을 돌려 복두산을 오른다.
작년처럼 산정 주변에서는 둥굴레와 은방울꽃이 귀여운 흰색 꽃들을 매달고 있는데 내 몸짓이 일으키는 미세한 진동만으로도 그 꽃으로부터 은색의 종소리가 울려 퍼져 나올 것만 같다.
삿갓나물과 우산나물이 의좋게 좁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던 자리에는 우산나물만 보인다.
다른 산에서 보니 삿갓나물은 이미 독거미 발처럼 생긴 꽃을 피웠던데 이전의 경험으로 보아 우산나물의 개화기는 삿갓나물보다 한참 늦다.
졸방제비꽃은 개화기가 꽤나 긴지 처음 본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꽃을 피우고 있는 녀석들이 많다.
일찌감치 세상구경을 한 다른 제비꽃들은 이미 결실기에 접어들었다.
제비꽃들은 꽃이 진 후에 잎이 상당히 커지는 경우가 많다.
어떤 제비꽃의 잎은 족도리풀 잎이 아닌가 할 정도로 크기를 키웠다.
이곳에서부터는 노린재나무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나뭇가지마다 하얀 솜털이 얹혀 있다.
갑자기 검노린재나무가 생각나서 검노린재나무를 한 번 찾아봐야겠따는 생각이 든다.
노린재나무는 열매가 벽색이고 검노린재나무는 흑색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특징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계절이기에 다른 구분점을 기억해내려 하는데 잘 떠오르지가 않는다.
아마도 잎 뒤에 있는 맥 위에 털이 있느냐 없느냐가 이 둘 간의 차이라는 생각이 들어 줌으로 잎 뒷면을 당겨봤지만 날이 흐려서인지 액정에 나타난 그 모습은 내게 정확한 정보를 주기를 거부한다.
별 수 없이 또 요모조모 사진을 찍어왔는데 알고 보니 검노린재나무는 그곳에 털이 많지만 노린재나무도 털이 있기도 한다는 것이다.
완전히 포인트를 잘못 짚었다.
다시 한 번 자료를 면밀히 검토해보니 검노린재나무의 수술에 대해 한 자료에서는 "5개"라고 하고 다른 자료에서는 "5군으로 나뉜다"고 한다.
나름대로 추측해 본 결과 검노린재나무의 수술도 노린재나무의 수술처럼 많기는 한데 그게 5개 군으로 묶여 마치 5개인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렸다.
그렇다면 이 수술의 모습으로 둘을 구분하는 것이 가장 확실할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렇지만 검노린재나무는 남부지방에서만 자생하고 있는 나무이니 일단은 중부지방에서 노린재나무를 다시 들여다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복두산에서부터 철마산 제1봉까지는 이렇다 할 꽃 핀 식물이 눈에 띄지 않는다.
제1봉에 이르니 초봄에 복수초가 피었던 자리에 민백미꽃이 여럿 자라고 있다.
몇 번 본 식물이기에 그냥 지나치려 하다가 언뜻 보니 꽃이 이제까지 보았던 것보다 훨씬 작았다.
혹시 유사종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찍기 작업을 했다.
그런데 그렇게 생긴 민백미꽃은 한 가지 종류뿐이라네. ㅠㅠ
제1봉 근처에서 작년에 천남성 종류를 많이 보았었는데 시기적으로 지금 펴 있어야 할 녀석들이 어찌 된 일인지 단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천남성과 식물은 대부분 독초에 속하는데 혹시 이것도 나물이라 생각하고 누군가 다 채취해 간 건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약재로 사용하기 위해 누군가 캐 갔을지도 모를 일이긴 하다.
천남성을 찾다 보니 민들레가 하나 눈에 든다.
이렇게 높은 산에서 민들레를 만나 건 처음이라 혹시 저게 산민들레라는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 귀여운 녀석이 내 짐작에 딩동댕을 울려주었다.
총포를 보니 외포편이 뒤로 젖혀지지 않았고 그 끝에 뿔 같은 돌기가 달려 있지 않다.
이것이 바로 산민들레의 특징인 것이다.
1시가 훌쩍 넘었다.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고 점심을 먹는데 아침도 거른 상태였지만 별로 허기가 지지 않는다.
반쯤 먹다 말고 일어나서 주변을 둘러본다.
보이는 건 떡갈나무, 상수리나무, 매화말발도리, 철쭉, 진달래, 노린재나무뿐이다.
이 산의 식생은 그다지 다양하지 못하다는 건 올 때마다 느끼는 점이다.
어슬렁거리다 바위 위에 붙어 자라는 작은 식물 하나를 발견한다.
이제 막 자라나기 시작한 부처손이다.
수목원에서 보고 야생에서 보기는 처음이다.
남겨 가기도 뭐 해서 남은 식사거리를 마저 먹으면서 눈을 드니 터진 나뭇가지들 사이로 앞산이 언뜻언뜻 모습을 드러낸다.
한낮의 햇살을 받은 산이 찬란한 빛을 발한다.
바람이 제법 드센지 앞 산의 나무들이 일정한 방향 없이 너울거린다.
진초록과 연초록만으로 연출한 그 군무가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제1봉에서 철마산 정상까지 가는 동안에도 산민들레 이외에 아무 것도 만나지 못했다.
정상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아래에 있는 철마부대 사격장에서 올라온 총성이 산의 고요를 범한다.
총성에 놀랐는지 연신 내 주변에서 울어대던 새들이 교향악을 그쳐버린다.
정상에는 키 작은 나무들만 몇 있어서 시선은 크게 진로를 방해받을 일이 없다.
눈을 크게 뜨니 하늘과 산 아래 마을까지 한꺼번에 시야에 든다.
크게 눈도 껌벅여 보고 심호흡도 여러 번 해본다.
눈과 코를 통해 스며든 알 수 없는 기운이 발끝까지 전해지는 느낌이 든다.
올라오는 중에 사실 특별한 게 없었던 건 아니다.
붉은색 병꽃나무 종류가 많았었는데 그 종류를 구분해 보기 싫어서 그냥 지나치고 말았었다.
마침 간단한 구별법을 적어둔 메모 노트도 잊고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상 주변에 병꽃나무 종류가 세 가지나 자라고 있지 뭔가.
하나는 그야말로 한 눈에 병꽃나무임을 알 수 있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붉은색 꽃을 피우고 있었으며 나머지 하나는 분홍색 꽃을 피우고 있었다.
에고, 또 할 수 없이 그들한테로 다가갔다.
이제까지 알던 바로는 소영도리나무와 산소영도리나무는 꽃이 분홍색이고 붉은병꽃나무와 골병꽃나무는 꽃이 붉은색이라는 것인데 이날 최종적으로 정리한 바에 의하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는 것이다.
분홍과 빨강의 경계에 있는 애매모호한 색도 있기에 색으로 이들을 구분하는데는 무리가 따른다.
결론적으로 붉은병꽃나무와 골병꽃나무는 꽃받침 열편이 고르게 갈라져 있고 나머지 둘은 갈라진 깊이가 서로 다르다는 점이 포인트다.
처음에는 자료에서 소영도리나무와 산소영도리나무의 꽃받침 열편의 길이가 서로 다르다고 해서 그 열편의 끝이 일직선 상에 있지 않은 걸로만 생각했는데 나중에 신경 써서 자료를 다시 읽어 보니 그 말이 아니었다.
갈라진 깊이가 서로 다르다는 말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일단 이렇게 두 그룹으로 나누어 놓은 다음에는 꽃받침통에 털이 있는냐 없느냐만 보면 된다.
골병꽃나무와 소영도리나무는 털이 있고 나머지는 털이 없다.
이제 이 넷의 구분은 언제든 가능할 것이다.
막 자리를 뜨려는데 이상한 리본 하나가 내 눈길을 잡아챈다.
보통 산악회 이름이 적혀 있어야 할 리본에 일반적 통념을 깨고 "죽어도 좋아"란 문구가 인쇄되어 있다.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여러가지 추측이 가능하지만 어떤 사유로든 간에 산행에 충실해야 할 필요가 생겼고 그걸 어떤 일이 있어도 실천해내고야 말겠다는 강인한 의지의 표현 정도로 생각키로 하고 만다.
그런데 문제는 그 문구의 내용을 마치 "너 따위는 죽어도 좋아"라는 뜻으로 해석을 했는지 리본이 묶여 있던 떡갈나무가 고사해 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리본 때문에 그런 건 아니지만 참으로 웃지 못할 조합이다.
6시간 정도를 걸어왔는데 다시 그 길을 되짚어갈 수는 없다.
원래는 철마산에서 몇 시간 더 떨어진 주금산까지 다녀올 생각이었는데 식물 감상하면서 천천히 걸었더니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다.
두 시간 정도 내려가서 버스를 타고 집에 갈 수 있는 코스로 하산하기로 한다.
하산하는데는 한 시간 조금 더 걸렸는데 거기서부터 평지를 또 한 시간 정도 걸어야 버스정류장이 나온다.
급할 것도 없기에 천천히 도로변을 살피다가 처음 보는 냉이 종류 하나를 발견한다.
뿌리잎과 줄기 아래쪽 잎은 깃꼴겹잎인데 줄기 위쪽 잎은 밑 부분만 한 번 갈라졌는데 그 모습이 마치 창의 끝 부분 모습이다.
이게 긴갓냉이의 특징이었다.
새로운 냉이류를 하나 또 만난 셈이다.
좀 더 내려오다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은 나중에 동정해 보니 긴잎산사나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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