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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단상(斷想) 모음

명함을 정리하면서

by 심자한2 2010. 8. 23.

 

명함집에 있는 명함들을 모두 꺼내놓는다.

명함들을 하나하나 집어 전화번호를 확인한 후 일일이 모바일폰에 입력하고

저장한다.

상당 수 명함은 일별만 하고 다시 명함집에 꽂아버린다.

처음부터 인사치레로 받아둔 것이거나 시간이 지나 용도가 소멸된 그런

명함들은 이렇게 졸지에 찬밥 신세가 된다.

며칠 전 모바일폰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언젠가는 모바일폰에서 이런

번호들을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생각보다 불필요해진 명함들이 많아 이전에 그런 삭제작업을 했더라면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을 거란 생각이 든다.

바뀐 전화번호도 꽤 많았다.

바뀌었다는 건 분명히 아는데 새로운 전화번호를 알 도리가 없어

이전 전화번호가 적혀 있는 그런 명함도 홀대의 대상이 되기는 마찬가지다.

명함 주인 자체가 명함에 적힌 그 회사에서 퇴사를 한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런 명함들을 보면서 그간 들었던 소문이 하나하나 되살아난다.

스스로 사표를 낸 사람도 있고 소위 퇴사를 강요 당하거나 정리해고된

사람도 있다.

각각의 경우에도 구체적인 사연은 구구각색이다.

 

명함집을 정리하다 보니 그간 내가 리비아에서 보낸 일 년 반 여의 시간이

자연스럽게 반추된다.

각각의 명함이 가지고 있는 사연들의 총체가 다름 아닌 내 리비아 생활의

결과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명함 한 장 한 장마다 우여곡절이 배어 있다.

명함이 대변하는 것은 사람 그 자체만이 아니다.

명함을 보고 있노라면 그 사람과 연계된 업무와 사건의 내용들까지 명함

속에서 줄줄이 엮여 나온다.

심지어는 당시 내가 느꼈던 희로애락까지 자기에게도 관심 좀 나눠 달라며

틈새에서 추파를 던진다.

어떤 명함은 내게 향기롭지 못 한 기억을 내밀고 어떤 명함은 내 입가에

미소를 매달아 주지만 모두들 이미 추억이란 이름으로 화석화가 진행

중이기에 전체적인 분위기는 대체로 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그 추억마저 버려야 할 나이에 내가 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내 안에도 무수히 많은 명함들이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 아직도 활용가치가 높은 명함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나 자신은 잃어버린 모바일폰을 대체하듯이 새로 장만할 수가 없으니

잃어버린 전화번호 입력하듯이 모든 걸 원점으로 돌린 후 이전의 인연을 새로이 

저장할 수야 없다.

그러니 이제는 수많은 인연들을 하나씩 하나씩 지워나가야 할 일만 남지 않았나

싶다.

그 간의 세월이 남겨놓은 퇴적층이 워낙 두꺼워 이런 정리작업에 할애해야 할

노력은 명함집 정리하는 것처럼 간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라면 되도록 이른 시점에 그 시작점을

놓아야 할 일이다.

앞으로의 여정에마저 잡동사니로 가득 찬 무거운 짐을 지고 떠날 수야 없지 않은가.

회자정리라 했거늘 지난 인연에 지나치게 집착할 이유가 없다.

나도 많은 사람들의 명함집이나 마음 속에 꽂혀 있는 하나의 명함일 것이다.

나라는 명함은 이미 오래 전에 삭제되었거나 그들의 기억회로 저 안쪽 한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초라하게 방치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굳이 이해관계에 집착한다면 이것도 내가 내 안의 명함을 정리해야 하는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지나간 시간 속에서는 내 안에 있는 명함의 갯수가 내 사회적 지명도의 척도가

됐을지 모르지만 먼 여행을 준비해야 하는 시점에서는 내 과욕의 지표에 다름

아니리라.

진정한 여행자의 짐은 가볍다.

짐이 무거울수록 여행의 참의미는 빛을 잃을 것이다.

마지막 여정에는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오은선 대장의 장비는 불필요하다.

빈 가슴과 빈 손으로 떠날 수 있도록 미리 미리 준비해야 할 일이다.

가을이면 낙엽을 떨구는 나무들처럼 나도 이제라도 내게 다가올 겨울에

그렇게 대비해야 할 시점에 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걸 오늘 이후의

화두로 삼는 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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