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있을 때도 그랬는데 여기서도 내가 잠자리에 들고 일어나는
시간이 불규칙하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초저녁에 밀려 오는 수면욕구에 몸을 쉽사리 내맡긴다.
이런 날에는 원래 총수면시간이 그다지 길지 않은 난 신새벽에 눈을 뜨기
일쑤다.
난 젊은 시절부터 하루에 한 번밖에 자지 못 하는 습관이 있었다.
일단 잠이 깬 후 다시 잠을 청하는 사치는 내 알량한 습관이 절대로 허락
하질 않았다.
그러니 초저녁에 잠자리에 든 날은 항상 다음날 새벽과 난 원치 않는
신경전을 벌여야 한다.
오늘도 무수히 많은 그런 날들 중 하나이다.
이런 날은 침대 위에서 할 일 없이 꼼지락거리는 게 싫어서 그냥 사무실로
내려와 버리는 경우가 잦다.
사무실이라고 해 봐야 숙소 바로 아래층에 있으니 갓 우화한 곤충이
날개를 말리듯 예비시간을 할애할 필요도 없이 말 그대로 그냥 쪼로록
한 층만 내려 오면 되는 것이다.
세면이나 샤워는 사무실에서 빈둥거리다가 출근시간이 다가오면 그때
올라 가서 하면 그만이다.
숙소와 사무실이 같은 건물 내에 있다는 게 이런 때는 도움이 된다.
오늘 따라 6시 무렵의 새벽공기가 차다.
이제 이 나라에서도 계절의 인수인계가 서서히 진행되고 있다는 걸
열려진 창을 넘어선 바람이 넌즈시 귀띔한다.
사무실에 내려 오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창을 여는 일이다.
내 하루의 시작을 외부의 시간과 소통시키기 위함이다.
그래야만 숫자 개념이 없는 내 안의 시간들에게 비로소 일자와 시간이
부여될 수 있을 거란 평소의 내 느낌이 내린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몽롱한 내 의식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작업은 컴퓨터를
켜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부팅이 완료되자마자 음악부터 틀어 놓는다.
컴퓨터 내장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응악이 내 안의 어둠 속에
널려 있는 무수한 꼬마전구들을 하나씩 하나씩 점등시킨다.
오늘은 지난 며칠 간 다운 받은 소위 뉴에이지 음악을 선택했다.
대부분 명상음악들인지라 음색이 차분하다.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준다는 그 명상음악들이 내 의식에
날개를 달아주기는 커녕 납덩이 역할만 하는 것 같다.
아마도 내 오늘 새벽 심리상태는 왕서방 비단은 아닌 모양이다.
음악이 듣는 사람의 심상에 영향을 주기도 하겠지만 오늘의 내게는
내 심상이 들을 음악을 선택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음악을 익숙한 연주곡들로 바꾼다.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어온 가요들이 정확히 각 연주자의 이미지
만큼의 음색으로 내 귓전에서 서성인다.
Jim Brickman의 Serenade, Claudi Ciary의 La Playa, X-man
Club의 Por una cabeza, Armik의 Rain Dancder 등등이 나름대로의
선율로 내 환심을 사려 서로 각축한다.
Windows Media는 선곡의 부담을 던 게 기뻤는지 스피커를 통해
토해 내는 음율이 맑다.
음악도 친구와 술처럼 오래된 것이 더 좋은 것인가.
아무리 반복해서 들어도 별로 싫증이 나지 않는 음악들이 있다는 게
오늘따라 신기하다.
화급하거나 밀린 일들이 있지 않는 한 출근시간까지의 시간은
전적으로 개인용도로 활용하고자 하는 게 이곳에서 내가 견지하는
불문율 중의 하나다.
음악은 내가 향유하고 있는 이 토막 시간의 배경에 불과하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야 할 차례이다.
사진 폴더를 연다.
잃어버린 캐논 디카가 그 동안 컴퓨터 하드 공간 이곳 저곳에 토해
놓았던 사진들을 호출한다.
녀석들 미리부터 이 순간을 기대했었는지 모두들 제각각의 취향대로
꽃단장을 이미 마친 상태다.
순간 화면이 화사해진다.
모두들 블로그에 올려질 사진으로 간택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전에 녀석들에게는 수인번호 같은 파일 일련번호 대신에 고유의
이름이 부여돼야 한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 사진 폴더에 남아 있는 사진들은 내가 이름을 알아
내지 못 해 오랜 시간 영어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 한 사진들뿐이다.
한 동안 출사의 기회를 잡지 못 했거니와 지난 금요일에는 모처럼
시간을 내었건만 디카를 눈앞에서 강탈 당하는 변을 당한지라 블로그와
연계시킬 만한 사진은 남아 있지 않다.
이런 이유로 습관처럼 거의 매일 해오던 이 작업에 제동이 걸리자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다.
이 무료가 애꿎은 담배만 제물로 강요한다.
내친 김에 이미 블로그 소재로 활용된 사진들에게도 외출 기회를
주기로 한다.
오랜 만의 해금이 그리도 반가웠는지 녀석들이 반색을 하며 뛰어나오자
마자 지난 계절과 지난 해들의 기억들을 주저리주저리 읊어댄다.
한 동안 상념이 시공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호사를 누린다.
그새 창 안과 밖의 밝기가 비슷해졌다.
어느 사이 난 개인시간과 업무시간의 경계를 넘어서 있다.
음악을 끄고 화면에 불러낸 사진들을 다시 제자리로 돌린다.
녀석들은 아쉬움 한 점 흘리지 않고 표연히 컴퓨터가 지정해 놓은 자신
들의 위치로 쏜살 같이 사라져버린다.
갑자기 그들의 무심이 서글퍼져 사내 인트라넷을 창에 띄우기가 싫어진다
잠시 멀거니 앉아 창 밖의 대추야자에 눈길을 준다.
제법 알이 굵은 적자색의 열매를 잔뜩 매단 다발이 제 무게를 감당하지
못 하고 축 늘어져 있다.
그 모습이 측은했는지 담장이 기꺼이 자신의 어깨를 내어주고 있다.
저 대추야자와는 조금 다른 이유로 지금의 내게도 저런 누군가의 배려가
필요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한 때 저 열매들 갯수보다도 더 많았을 내 꿈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인지.
지난 시간들이 만들어 놓은 심연에 투망을 던지면 얼마나 많은 내 빛바랜
꿈들이 건져 올려질까?
이제는 작성일만 바꾸면 어제의 시간표가 그대로 오늘의 시간표가 되는
단조로운 일상이 꿈의 최소화를 자꾸 부추기고 있다.
어쩌면 꿈들이 담길 내 안의 공간이 너무 좁아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가슴이라도 좀 넓히면 그나마 활력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는 꿈들이
활개를 칠 수 있으려나.
두 팔을 뒤로 한껏 제치고 크게 기지개를 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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