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만에 다시 천마산을 찾았다. 천마산이야 식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야생화의 보고로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산이다. 이런 산이 집에서 걸어서 한 시간 남짓의 거리에 있다는 게 참으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등산과 야생화에 대한 취미가 생기기 전까지는 이런 훌륭한 산이 집 근처에 있어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큰 축복인 줄 몰랐다. 그 축복을 가능한 한 많이 수혜하기 위해 오늘도 내 발걸음은 천마산 쪽으로 향한다. 마침 주도로에서 하루에 네 번 운행하는 마을버스 시간에 댈 수 있어서 오늘은 버스를 이용하여 근처까지 이동했다. 사실 버스를 이용하나 걸어가나 큰 차이는 없다. 버스로 이동하는 시간이 있는데다 버스에서 내려 등산로 입구까지 20여분 정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길이 그다지 우호적이지는 않다. 근처가 유원지라 음식점들이 많은데 다가오는 여름 한철 장사를 대비해 통행로를 넓히는 작업이 한창인지라 트럭들이 수시로 드나들어 길은 먼지투성이다. 조금 후에 눈앞에 펼쳐질 야생화들의 향연을 머릿속에 그리며 그 정도의 불편은 감내할 수밖에 없다.
들머리까지 트럭들이 일으키는 먼지를 들이마시며 걷는 와중에도 길가 축대 밑에 핀 분홍색 꽃이 시야에 든다. 꽃이야 두어 개 피었지만 한눈에 그게 줄딸기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다가가보니 생각대로다. 작년에도 근처에서 보았던 기억이 있기에 이 녀석이 언제 필 것인가 궁금했었는데 드디어 오늘 선물처럼 내게 첫선을 보였다. 우리나라 중부 지방의 딸기 종류 중에서 깃꼴겹잎을 가진 건 줄딸기와 복분자딸기 두 개인데 복분자딸기야 줄기에 흰 가루가 잔뜩 묻어 있어 내 눈앞에 있는 이것이 줄딸기임은 쉽게 알 수가 있다. 정성스레 꽃과 잎과 줄기에 난 가시 등을 디카에 담는데 동네 아낙 두 분이 곁을 지나면서 그 중 한 분이 무얼 하느냐고 묻는다.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다른 한 분이 대신 대답을 한다. “아, 보면 몰라. 딸기 사진 찍자너.” 난 고개를 돌려 말 대신 미소 한 가닥만 입 꼬리에 매단 모습을 보이고 만다. 잠깐 성대를 울리는 수고를 아끼고자 함이 아니라 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어서이다. 대답을 꼭 원하는 질문이 아니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동문서답이나 하듯이 “나물 뜯으러 가시나 보네요.”라는 말을 건네고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이곳이 그렇게 외진 시골은 아니지만 가끔은 이렇게 길거리 풍경에서 시골냄새가 물씬 나서 좋다. 야생화 탐사를 다니다 보면 이런 것도 기대치 않은 부가적 즐거움이 된다. 그런 광경을 만나면 시작부터 마음에 윤기가 흐름을 느낄 수 있다.
길가 언덕에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남산제비꽃들이 자주 시선 끝에 잡히면서 내게 들머리가 지척임을 확인시켜준다. 남산제비꽃은 참 오래도 핀다. 개화기간이 얼마나 긴지 모르겠지만 초봄부터 모습을 드러내더니 아직까지 세 넓히기에 여념이 없다. 단풍제비꽃은 상대적으로 귀하다. 그렇기에 남산제비꽃이라고 생각되는 것들만 보면 얼른 잎으로 눈이 간다. 남산제비꽃보다 잎이 훨씬 덜 갈라진 게 단풍제비꽃이라 혹시 그것이 아닐까 해서이다. 그런 노력 덕분에 오늘 산행에서 싱싱하게 피어 있는 단풍제비꽃을 만나긴 했지만 수적으로 남산제비꽃에 비해 한참 열세인 녀석이라 오늘 내 눈에 든 건 딱 하나뿐이다. 잎이 어중간하게 갈라진 것들도 있어 한 동안 이 둘의 구분에 애를 먹은 적이 있는데 요즘은 대략 어느 것인지 한눈에 짐작이 간다. 한 때는 혹시 둘의 꽃자루에 달린 포의 위치가 다르지나 않을까, 턱잎이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등등의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 식별 포인트를 찾기 위해 열심히 살펴보았지만 둘의 구분은 어차피 잎의 갈라진 모양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등산로 입구에서는 조팝나무가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리면서 만개를 준비하고 있다. 다음에 다시 여길 찾으면 저 조팝나무 위에 무수히 많은 팝콘들이 튀겨져 있을 것이다. 들머리 우측 계곡 쪽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 두 그루 중 하나는 물푸레나무인 줄 알고 있었지만 하나가 뭔지 몰랐었는데 오늘 보니 귀룽나무다. 아직까지 난 수피만으로 종류를 구별해낼 수 있는 나무가 그다지 많지 않다. 그새 파랗게 돋아난 잎들을 보고서야 비로소 난 그 나무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불러주었다. 귀룽은 이름 따위는 중요치 않다는 듯이 작은 잎을 살랑살랑 흔들며 부는 바람의 유희에 호응을 하느라 바쁘다. 그 위로 펼쳐진 파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햇살이 귀룽나무의 키 높이에서 가지와 잎에 부딪쳐 산산이 부서지더니 계곡물 위로 흩어진다. 그 눈부심에 물속에서 유영하고 있는 작은 고기들의 은빛 비늘이 무색해진다. 옆에서 그 광경을 굽어보고 있는 중 키 정도의 물푸레나무도 그 투박했던 겨울눈을 어느새 열고 혹 같은 꽃망울을 잔뜩 내놓고 있다. 다음에 오면 물푸레나무도 이제 주변의 나무들과 보조를 맞춰 수숫대 같은 긴 꽃차례를 치렁치렁 매달고 있으리라.
천마산 올 때마다 그렇듯이 입구에서 등산로를 버리고 계곡으로 들어선다. 아무래도 계곡 주변의 땅이 물기를 많이 머금고 있어 야생화들이 그곳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입구 계곡에 듬성듬성 보이던 얼레지가 어느새 사양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간간이 눈에 띄기는 하나 이전만큼 수가 많지는 않다. 가장 먼저 천마산의 봄을 한껏 구가하던 앉은부채와 너도바람꽃이 황망히 자리를 뜨더니 꿩의바람꽃, 만주바람꽃, 생강나무, 얼레지가 그 바통을 이어받으려 하고 있다. 처녀치마와 중의무릇도 그다지 개화기간이 길지는 않은지 벌써부터 자리를 는쟁이냉이와 현호색에게 내주고 결실준비에 돌입한 듯한 모습이다. 문득 얼레지의 넓은 잎에 그려진 얼룩이 처연해 보인다. 산에만 오면 항상 화무십일홍이란 말이 나도 모르게 뇌리에 떠오른다. 하나의 개체만 놓고 볼 때 꽃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기간은 너무도 짧다. 긴 겨울 동안 준비한 개화이건만 왜 그리도 식물들은 자신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꽃들의 영화를 그다지 시샘하는지 한때는 내가 다 섭섭한 마음 금할 길 없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건 인간의 기준에 불과한 푸념이다. 식물들에게 있어서는 꽃은 하나의 과정을 채우는 수단에 불과하고 목적은 결실이다. 최단시간 내에 결실을 위한 수분을 끝낼 수만 있다면 꽃의 존재는 더 이상 필요치 않겠지. 열매 없이 꽃만 피우다 한 해를 보낸 다는 건 종족번식을 지상목표로 하는 본능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일 테니 그런 생명체는 이미 멸종되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식물들이 인간의 감상을 위해 개화기간을 최대한 늘릴 이유가 전혀 없겠지. 그럴 정력이 남아 있으면 열매 키우는데 쓰는 게 당연한 처신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대에서 사라지는 꽃들을 볼 때면 서글픈 마음을 지울 수가 없는 건 무슨 이유에서일까? 우리네 삶도 어차피 일회적이기에 저 꽃들처럼 어느 날 갑자기 스러질 수도 있다는 비감이 이입된 탓일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모 카페에 사진 올렸다가 몇 사람으로부터 목 디스크 치료비용 물어내라는 으름장을 들었던 문제의 그 는쟁이냉이는 여전히 바위 틈새에 뿌리를 박은 채 모로 누워 있다. 동료들보다 먼저 세상 나들이를 나와 웃자라버린 탓에 훌쩍 커버린 몸체의 무게를 감당하기가 여전히 힘든 모양이다. 다른 는쟁이냉이들은 이제 막 개화를 시작하고 있다. 그런대로 모델이 괜찮다 싶은 것이 있어서 막 사진을 찍으려는데 근처를 지나던 야생화 사진 찍기 동호회 소속인 듯한 사람들이 서너 명 몰려오더니 먼저 자리를 점유하기에 난 꺼냈던 디카를 다시 원위치시키고 말았다. 천마산에 오르는 등산로가 몇 개 되지만 유난히 이곳에만 야생화들이 천국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마도 이 등산로가 한 동안 세인들에게 그다지 알려지지 않아서일 게다. 지명도가 높은 등산 코스였다면 아마도 이 계곡은 야생화 천국이란 명성을 처음부터 들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야생화를 비롯한 식물들에게 최대의 적은 인간이라는 인식이 점점 세를 더하고 있다. 이곳은 평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올 때마다 일정 수의 사람들을 만나는데 대부분 목에 커다란 카메라를 매달고 있다. 교통이 불편한 탓인지 일반 등산객들은 아직까지도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이 이곳의 식생들에게는 그나마 다행이리라. 야생화 출사를 나온 사람들은 식생 훼손 금기 원칙을 대체로 잘 지키는 편인가보다. 그건 사진을 찍기 위해 주변을 정리한 흔적이 남아 있는 야생화들이 거의 대부분 건재하다는 사실이 잘 증명해주고 있다. 인식도 시대에 따라 변해가기는 가나 보다. 하긴 그 수혜자는 당연히 우리네 인간들일 테니 당연히 그래야겠지만.
이곳에는 양지꽃 외에도 세잎양지꽃이 유난히 눈에 많이 띈다. 계곡을 따라 계속 올라가 보지만 저번에 왔을 때보다 특별히 새로 선을 보이는 풀꽃들은 없다. 혹시나 해서 흰얼레지, 노랑미치광이풀, 애기괭이밥, 매미꽃이라도 만나는 행운을 안아보고자 계곡 주변 곳곳에 세심한 눈길을 주어보았지만 그 기대는 충족되지 않는다. 보이는 건 얼레지, 미치광이풀, 큰괭이밥, 피나물뿐이다. 흰얼레지와 노랑미치광이풀이야 어느 정도 거리에서도 알아볼 수 있지만 애기괭이밥과 매미꽃은 가까이 다가가 잎과 꽃대를 살펴봐야 알 수 있기에 큰괭이밥과 매미꽃만 보이면 그쪽으로 다가갔다. 큰괭이밥은 이미 꽃들을 모두 떨어내고 그 자리에 길쭉한 열매를 쑥 내밀고 있었고 반으로 접혔던 잎들도 모두 펴진 상태다. 보는 잎마다 모두 세 장의 역삼각형 모양이다. 거꾸로 된 심장형 잎은 끝내 눈에 띄지 않는다. 피나물은 모두 줄기에서 꽃대를 내고 있다. 뿌리에서 나온 꽃대에 대한 기대의 풍선은 순간 바늘로 콕 찔리고 만다. 그 헛수고에 대해 보상이라도 하듯이 얼마쯤 가다 금붓꽃 한 송이가 내 눈에 든다. 작년에 보니 각시붓꽃이 먼저 선을 보이고 금붓꽃은 어쩌다 한둘 씩 보이더니 올해는 얘들이 그 순서를 바꿨나보다. 정성들여 사진을 찍은 후 그 자리에 앉아 꽃을 한참 내려다본다. 꽃을 보고 있노라면 식물들의 그 오묘한 작품에 저절로 감탄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미래의 모습을 예견하고 어떻게 그 뭉치고 오그라진 축소판을 겨울눈 속에서 만들어내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신비롭기만 하다. 내친 김에 물통을 꺼내 물을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젖히니 잎 반, 꽃 반인 산벚나무 사이로 비치는 하늘이 여전히 싱그럽다. 하늘에 점재하는 구름이 이 자리에 벌러덩 누워 시간 좀 보내는 게 어떠냐고 권유하지만 오늘은 과감히 그 유혹을 뿌리치기로 한다.
잠시 생각하니 난쟁이붓꽃이라고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 특징이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집에 가면 우선 이것부터 확인해봐야겠다. 그래야 다음에 각시붓꽃을 만나면 혹시 난쟁이붓꽃이 아닌지 구분해낼 수 있을 테니. 그런데 하산하면서 결국은 각시붓꽃도 내게 인사를 하고야 말았다. 잎은 길쭉한데 꽃대는 아주 짧아 느낌만으로 이것이 난쟁이붓꽃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는데 나중에 자료를 보니 난쟁이붓꽃은 꽃이 필 때 오히려 잎보다 꽃이 더 키가 크다고 한다. 금붓꽃은 조금 더 오르다가 몇 개체 더 발견했다. 그 바로 밑 바위 틈새에서 핀 괭이눈 종류에 남자가 열심히 렌즈 초점을 맞추고 부인은 그 옆에서 우산으로 빛을 가려주고 있다.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그게 무어냐고 물으니 선괭이눈이라고 한다. 이런, 난 이제까지 그것이 단순히 흰괭이눈일 거라고만 생각하고 그냥 지나쳤었는데... 그 부부가 사진 작업에 여념이 없는 동안 난 금붓꽃 사진이나 몇 장 더 찍다가 그 부부가 자리를 뜨자 나도 그곳으로 가서 사진을 구석구석 열심히 찍었다. 사진을 찍으면서 살펴보니 잎이 마주나지 않고 어긋나는데 잎이 아주 작다. 자꾸만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드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흰괭이눈도 선괭이눈도 아닌 산괭이눈이었다. 일전에 다른 곳에서 이미 보았던 것이기에 그런 친숙한 느낌이 들었나보다. 야생화 공부라는 게 참 어렵다. 한 번 보았다고 해서 그 이름과 특징이 곧바로 기억되질 않는다는 점이 가끔 내 의기를 소침하게 한다. 식물 공부는 단순히 머리와 집중력만으로는 되지 않나보다. 설익은 지식을 잘 숙성시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시간과 상당한 경험이 필요한 것 같다. 이런 속성으로 인해 야생화에 대한 취미생활은 어쩌면 성질 급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안 맞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늘날의 현실은 이런 우려가 기우임을 입증하고 있다. 야생화에 대한 취미는 이제 더 이상 틈새시장이 아닐 정도로 야생화에 취미를 둔 인구가 상당히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전에 보았던 흰괭이눈이 있는 곳으로 갔다. 이곳에 있는 흰괭이눈이 내가 알기로는 이 계곡에서 가장 먼저 핀 것이었다. 언뜻 보니 그곳에 있어야 할 녀석이 자취를 감췄다. 이런, 누군가가 뽑아버렸나 보다 하면서도 다시 한 번 눈여겨보니 그새 녀석의 키가 훌쩍 커버린데다가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고 있어서 내가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가장 먼저 꽃을 피운 탓에 이 녀석은 벌써 열매를 맺었고 씨앗을 세상으로 내보낼 채비를 하고 있다. 괭이눈이란 말이 열매가 익을 때 두 개로 깊게 갈라지는 모습이 마치 고양이의 눈처럼 보인다 하여 붙여진 것이라 하는데 이 녀석을 보니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아 헷갈린다. 고양이 눈처럼 보이든 말든 내 눈에는 협소한 그릇 같이 생긴 공간에 까맣고 자그마한 씨앗을 잔뜩 품고 있는 그 모습이 더 인상적이다. 줌으로 당겨보니 그 모습이 더욱더 아름다워 필요 이상으로 많은 컷을 할애하고 말았다. 같은 부분 사진을 많이 찍으면 혹시나 있을, 아니 아주 자주 발생하는, 초점이 흐린 사진들을 대체할 수 있어 좋지만 취사선택 후 버려야 할 것들이 많아져서 곤혹스럽기도 하다. 난 아직 초보수준이라서 이 딜레마를 해결해내지 못하고 두 경우를 모두 번갈아 시험해보곤 한다.
더 올라가면 얼레지 군락이 있는 줄 알면서 오늘은 이쯤에서 하산하기로 결정한다. 언제든 훌쩍 다시 방문할 수 있는 곳이기에 그다지 무리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다행히도 “언제든”이란 말을 쉽게 쓸 수 있을 정도로 최근에 야생화 탐사에 관한 한 집을 나서고자 마음먹는데 거의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내려오는 길은 등산로를 이용하기로 한다. 등산로 주변에서는 각종 제비꽃들이 서로의 미색을 자랑하느라 정신이 없다. 민둥뫼제비꽃, 고깔제비꽃, 잔털제비꽃, 태백제비꽃, 남산제비꽃, 단풍제비꽃 등등이 내 시선 끝에 머물 때마다 난 그 이름을 마음속으로 되새겨본다. 오늘은 올해 처음으로 알록제비꽃도 한 그루 만났다. 알록제비꽃이나 노랑제비꽃만 보면 난 반갑기 그지없다. 둘 다 꽃 색이나 잎 무늬가 특징적으로 생겨 그 이름을 알기 위해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제비꽃들은 종류도 많고 각각의 특징이 눈에 확 들지 않는다. 작년에 제비꽃 때문에 하도 고생을 해서 한 번은 잎, 꽃, 포, 꽃받침, 부속체, 털 등등 30여 가지의 항목을 만들어놓고 국가표준식물목록의 설명을 기준으로 하여 모든 제비꽃들을 그 항목별로 정리해본 적이 있다. 며칠에 걸쳐 그 힘든 작업을 마치고 난 후 얻은 결론이 국가표준식물목록의 자료만으로 그 모든 제비꽃들을 구분해내기는 어렵다는 것이었기에 실망이 적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작업의 결과가 올해 만난 제비꽃 종류 구분에 시간과 노력을 많이 경감시켜주고 있기는 하다. 물론 아직까지 제비꽃 종류만 만나면 그것을 동정해내야 하는 나중의 일이 생각나 가슴이 먼저 먹먹해지고 있는 현상까지 치유해내지는 못하고 있다. 오늘도 잔털제비꽃과 유사하긴 한데 잎이 좀 더 길쭉한 것이 있어 내가 못 봤던 종이리라 생각하고 꽤나 신경 써서 요모조모 사진을 찍어두었는데 나중에 내려오다 보니 비슷한 녀석이 나타나는데 잎에 톱니가 결각 수준으로 깊게 나 있지 뭔가. 그건 바로 태백제비꽃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잎만 조금 다른 것을 만나면 새로운 종이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이니 제비꽃의 종류가 많기는 많은 거다. (이렇게 말해야 내 일천한 실력이 뽀록나지 않겠지... ㅎㅎ)
너무 땅만 쳐다보고 다니는 것 같아 고개를 드니 내 앞으로 앞산이 선뜻 다가선다. 산벚나무 수가 많다 보니 산이 마치 단풍든 가을 산 같다.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니 내 곁을 스치는 세월이 갑자기 가속페달을 밟는 느낌이 들어 얼른 눈을 돌려보지만 고개는 어느새 다시 그쪽으로 향해 있다. 자연의 미는 거부의 대상이 못 되나보다. 요즘 읽고 있는 책에서 저자는 “마지막 스승은 자연“이라고 하던데 산속에 자주 들어오다 보니 그 말이 실감이 난다. 저 앞산이 현세의 번뇌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은 자연밖에 없음을 설파하고 있는 듯하다. 현실적으로 자연 속에 묻혀 살 수 없다면 이렇게라도 자연을 찾는 빈도를 높이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말은 산벚나무라고 했는데 저것들이 정말 산벚나무인지는 아직 확인해본 바가 없다. 마침 저만큼의 거리에 가지를 낮게 늘어뜨리고 있는 녀석이 있기에 가서 살펴보기로 한다. 벚나무 종류의 특징을 구분해본 게 불과 일주일 전인데도 왕벚나무와 산벚나무를 구별해주는 특징이 가물가물하다.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잎자루를 만져본다. 과연 보았던 설명대로 약간의 점착성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으로 단정하기는 이르다. 고심을 하면서도 일단 집에 가서 동정해보기 위해서는 잎, 잎자루, 꽃, 꽃자루, 꽃받침, 소지 등등에 대한 사진이 필요하다. 막 꽃 정면 사진을 찍으려는데 다른 한 가지 특징이 저절로 떠오른다. 꽃잎 끝이 오므라든다는 점이다. 당연히 찍으려던 꽃의 꽃잎이 오므라져 있기에 그 특징이 기억 속에서 다행히 되살아난 것이다. 이렇게 현장에서 어떤 식물의 종류를 파악해내고 나면 날아갈 듯이 기쁜 걸 보면 내 취미생활도 꽤나 깊어진 모양이다.
가끔은 산속에서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그건 단지 화두로서의 역할밖에 못한다. 그 해답을 찾기 위한 좌고우면은 산을 다 내려간 후의 일이다. 산속에 있는 동안은 그저 자연과의 교감에 내 몸과 마음을 맡기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들머리까지 내려선 내 마음속에는 언제나처럼 이 정도의 자위가 채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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