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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갤러리-풀꽃나무

식물 탐사 일기 - 국립수목원

by 심자한2 2008. 5. 14.

 

07.05.13 (화)

하루 종일 비가 오다 그치다 한다 했지만 하늘을 보니 먹구름이 잔뜩 껴 있긴 하나 아무래도 비가 이미 소강상태로 접어든 듯하고 와봐야 양이 그다지 많지 않을 것 같아 국립수목원 나들이를 결정한다.

중간에 버스를 한 번 갈아타야 하는데 오늘은 운이 좋게도 배차간격이 30분도 넘는 연계 버스가 일찍 왔다.

이런 날은 괜스레 뭔가 특별한 식물 하나쯤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기분이 썩 괜찮다.

 

비 소식이 있었음에도 수목원에는 생각보다는 입장객이 많았지만 단체관람객이 거의 없어 그래도 한적하다는 표현을 써도 될 만한 수준이었다.

항상 그렇듯이 입구 사거리에서 우측으로 꺾어져 주 관람로를 걷는다.

군데군데 지장보살이라 별칭하는 풀솜대가 피어 있다.

작년에 처음 보았을 때 참으로 신기해 했던 풀꽃이건만 이제는 하도 자주 보게 되서인지 시큰둥하다.

시각도 희소성의 원칙을 적용해 뇌에 전달하는 강도를 적절히 조절하는가 보다.

 

만경원으로 들어선다.

거기에도 울타리 옆에 풀솜대가 자라고 있다.

너무 등한시 한 거 같아 미안한 마음에 카메라를 꺼내들고 촛점을 맞추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있다.

무시하고 몇 컷 더 찍은 다음에 일어서는데 그냥 가려다 돌아선 남자 하나가 "그거, 혹시 선밀나물 아니냐?"고 묻는다.

선밀나물이 아니라 풀솜대라고 답해 준다.

그 사람은 고맙다면서 내가 쪼그리고 앉았던 자리로 가더니 꽃 앞에서 아까 내가 취했던 자세와 비슷한 자세를 재연한다.

내가 알고 있는 식물 이름을 누가 물어서 알려주면 기분이 좋다.

그런데 누가 식물 이름을 물었는데 내가 그걸 모르고 있을 때는 아주 속상하다.

이제까지의 공부가 졸지에 어린아이의 한 호흡에 와르르 무너져버리고 마는 느낌마저 든다.

오늘은 마침 내가 아는 식물의 이름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는 것보다는 그 사람의 사리분별력이 적절히 발휘되었다는 게 무척 기분이 좋다.

한참 사진을 찍고 있는 동안에 질문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사람은 내 활동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질문을 삼가고 잠시 기다리다 시간 좀 걸릴 거라 생각했는지 그냥 가던 길을 가려던 참이었다.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하지만 이런 배려가 하루의 기분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만경원이기에 으아리, 다래, 머루, 등, 으름덩굴, 노박덩굴 등등의 덩굴식물들이 주로 식재되어 있는데 한편에 보니 푼지나무라는 팻말이 보인다.

푼지나무 자체도 처음이라서인지 어째 이름이 덩굴식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자세히 살펴 보니 잎겨드랑이에 자잘한 녹색빛 꽃 같은 게 여럿 모여 있는데 꽃 같기도 하고 꽃잎이 떨어진 후 남아 있는 꽃받침 같기도 하다.

일단 사진을 찍어왔는데 그게 바로 꽃이었다.

식물들의 꽃 크기는 참으로 다양하다.

꽃의 크기는 반드시 덩치에 비례하지도 않는다.

그런 결과물을 내놓기까지 얼마나 긴 세월 동안 푼지나무는 숙고에 숙고를 거듭했을른지.

 

등칡의 꽃은 사진에서만 보고 실물을 보지 못했는데 이곳의 등칡은 내게 소원풀이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개화기가 지난 건지, 아직 개화 전인지 모르겠다.

더 이상 내 관심을 자극할 만한 식물이 없기에 길가에 피어 있는 냉이 종류 하나를 찍기로 한다.

노란색 꽃을 피우고 있고 줄기잎이 갈라지지 않은 것으로 작년에 이미 일면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통 그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나중에 도감의 그림과 설명문이 내게 그것이 개갓냉이임을 알려준다.

한 번 만났던 것 중에서 몇 퍼센트 정도가 기억에 남는 건지 궁금하다.

갈퀴덩굴은 수시로 눈에 띄었었지만 아직은 꽃을 피우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는데 당겨진 줌 속에 있는 잎겨드랑이는 꽃 형태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꽃이 너무 작아 육안으로는 폈는지 안폈는지 잘 보이지 않아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는쟁이냉이는 전혀 보이지 않고 미나리냉이는 간간이 풀섶에서 하얀 고개를 삐죽 쳐들고 있긴 한데 그다지 고자세가 아닌 것으로보아 그 개화기도 곧 마감될 시점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

작년에 보았던 바로 그 자리에서 올해도 삿갓나물이 독거미의 발 같은 꽃을 곧추 세워놓고 있다.

일전에 산에서 이미 디카에 담은 것이었지만 그 모습이 다소 특이해서 한 번 더 카메라를 꺼내든다.

만경원을 벗어나자 좌측 길 건너편에 구주피나무가 보인다.

긴 자루에 매달린 꽃봉오리인지 열매인지가 길쭉한 받침대 같은 작은 잎에 얹혀 있다.

그것이 개화 전의 꽃차례이고 받침대 같은 것이 포라는 걸 안 건 물론 나중이다.

다소 특이한 형상이기에 눈길이 저절로 간다.

 

수생식물원에 도착하니 가장 먼저 작년에 보았던 만추의 풍경이 환영으로 떠오른다.

그 기억이 그래도 미려했었던 모양이다.

바람이 쉬는 틈에 호수가 유리처럼 반질잔질하게 닦아 놓은 수면에 비친 수목들의 그림자에서 울긋불긋한 색체가 되살아난다.

그 영상을 서서히 세를 넓혀 가고 있는 수련의 넓은 잎들이 조금씩 잠식해 가고 있다.

수련이 꽃을 피우면 곧 이어 폭염과 장대비가 한 계절의 영속을 시샘하겠지.

그 기승도 결국은 후임 계절의 위세 속에서 속절없이 무너질 날이 수면 하에서 조용히 대기하고 있으리란 상념이 갑자기 시간에 날개를 다는 것만 같아 얼른 고개를 흔들어버린다.

고개는 가만히 있는데 호수가 좌우로 잠시 움지이는 착각이 든다.

 

사초류 몇 가지는 저번에 왔을 때 그대로다.

그렇지 않아도 골치 아픈 사초들이기에 얼른 자리를 뜬다.

저들은 무심하게 가녀린 잎들만 미풍에 하늘거리고 있는데 괜히 나 혼자서만 신경전이다.

그새 도루박이가 꽃대를 올려놓았다.

꽃차례가 성겨서 사진 찍기가 꽤 까다롭지만 그래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도루박이는 단일종인 줄 알았는데 에효, 검은도루박이란 녀석도 있네.

설명을 아무리 읽어봐도 둘 간의 차이점이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다.

도루박이는 가지 끝에 작은이삭이 하나씩 달리고 검은도루박이는 1~3개 달린다는 것과 사진 속 작은이삭의 색이 검다는 것으로 그냥 검은도루박이로 동정하고 만다.

 

한쪽에서 버들까치수염이 노란 꽃차례를 잎겨드랑이에 올려놓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꽃을 피웠다.

저것도 다음에 오게 되면 이미 꽃을 모두 떨구고 열매를 맺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 옆의 조름나물이 지금 그렇듯이.

사실 모든 꽃들을 놓치지 않고 다 섭렵하려면 여간 신경을 쏟지 않으면 안 된다.

가야할 산도 많고 찾아야 할 수목원도 많아서 정말 바쁘다.

아무리 취미생활이지만 어느 정도 흥미를 못 느끼면 소화해내기 아주 어려운 일정이다.

 

문모초는 며칠 전 선유도공원에서 한 번 봤다고 여기서도 얼른 눈에 띈다.

꽃이 너무 작은데다 식물체 자체가 그다지 주목을 끌 만한 모습이 아니어서 세인의 사랑은 애초부터 포기하고 사는 식물이다.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선유도공원에서 찍었던 많은 열매 사진 속에서 대부분 꽃받침과 열매 껍데기 가장자리는 밋밋했는데 유독 한 사진에서만 꽤 긴 털이 관찰되었다.

더구나 그 털이 관찰된 사진 속에서만 벌레의 유해 같은 게 보였기에 혹시 그게 벌레잡이 도구가 아닌가 궁금했었는데 오늘 이곳의 문모초를 보니 모든 열매에 털이 관찰된다.

공연히 학자들도 모르는 문모초 열매의 벌레잡이 기능을 발견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던 게 쑥스러워진다.

  

호숫가에 블루베리란 나무가 은방울 같은 꽃을 잔뜩 매달고 내 시선을 자극하기에 기꺼이 그 유혹에 넘어갔다.

별다른 수생식물이 없어서 물가 돌틈에 자라고 있는 돌나물 꽃과 너도바람꽃 열매와 비슷하게 생긴 동의나물 열매도 찍었다.

왜개연꽃은 꽃대를 물 위로 잔뜩 내밀고 있는데 그 중 성급한 녀석 몇 개가 꽃봉오리를 다소곳이 벌리고 있다.

물가에서 좀 멀어 접사가 불가능했기에 식물 모드를 써서 줌으로 당겨 꽃과 잎을 카메라에 담았다.

작년에 개연꽃과 왜개연꽃, 남개연꽃의 구분에 대해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오늘 그때 결론으로 내렸던 내용을 다시 한 번 읽어 보니 아무래도 헛다리를 짚은 것 같다.

이번에는 국가표준식물목록의 설명 내용을 충실히 반영해 새로운 기준점을 정립했다.

이 기준의 적합성 여부는 나중에 실물을 관찰하면서 확인될 것이다.

이와 같이 한때는 정말 확실하다고 스스로 믿었던 것이 나중에 보면 비록 허무맹랑하지는 않더라도 오류였음이 판명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니 평소에 너무 자기 주장을 강하기 밀어붙인다면 후일 그 만큼 후회의 강도가 세질 것이다.

항상 식물이나 사람 앞에서 겸허해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를 이 사례는 암시한다.

 

오늘만 해도 또 하나의 유사 사례가 더 생겼다.

병꽃나무 종류로 꽃이 분홍색이기에 소영도리 아니면 산소영도리라고 생각하고 살펴봤는데 다행히도 거기까지는 맞았다.

꽃받침 열편을 살피다 보니 갈라진 깊이가 제각각이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나는 이 현상을 두고 자료에서는 꽃받침 열편의 길이가 서로 다르다고 했구나 생각하고 차라리 그런 표현보다는 갈라진 깊이가 서로 다르다고 하는 편이 나으리란 견해를 피력했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그것도 틀렸다.

물론 갈라진 깊이도 다르지만 그와 관계 없이 각 열편의 길이도 서로 차이가 있었다.

결국은 애꿎은 자료 작성자만 내 무식과 경박의 재물이 된 셈이다.

허물 있는 자가 죄 없는 사람을 단죄한 꼴이 되고 말았다.

 

조팝나무도 반호테, 산, 갈기, 애기, 참, 꼬리 등 여러가지가 있는데 각각 개화시기가 다른지 일부만 꽃을 피웠다.

조팝나무 동정도 그다지 녹록치 않은지라 귀찮아서 다음에 모두들 꽃이 핀 후에 시도해보든지 말든지 하기로 하고 그냥 지나친다.

모란은 꽃만 크지 개인적으로 아무리 봐도 화려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아무래도 풀꽃에 관심을 오래 갖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작은 식물체나 꽃에 더 연민과 애정을 느끼게 되서 그런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대충 모란의 잎에는 작약과 달리 결각이 있다는 걸 확인하고 모란은 나무이고 작약은 풀꽃이라는 사실만 상기하고 돌아선다.

 

 

오늘의 하일라이트는 샴쌍동이 잎이다.

가막살나무를 관찰하는데 이것이 가막살나무인지 산가막살나무인지를 판정하기 위해 잎의 뒷면 맥 위를 봐야 한다.

맥 위에 털이 있으면 산가막살나무이다.

어떤 잎을 살펴 볼까 이것 저것 물색하다가 다른 것에 비해 넓은 잎 하나가 눈에 띈다.

그런데 언뜻 보니 잎 끝이 두 개다.

주맥을 잘 살펴 보니 분명히 두 개의 잎이 붙은 것이다.

그런데 너무 기이해서 잎몸만 살피다가 잎자루가 한 개인지 두 개인지를 관찰하지 못하는 실수를 범했다.

잎자루 갯수에 관계 없이 잎몸 두 개가 샴쌍동이처럼 붙었다는 게 너무 신기하다.

두 나무의 가지가 서로 붙는 연리지 현상은 깊은 산에 다니다 보면 심심치 않게 보는데 잎 자체가 이렇게 붙어서 나는 것은 어떤 책에서도 보지 못했을 정도로 내게는 아주 귀한 경험이다.

다음에 다시 그 자리에 갔을 때도 그 잎이 그대로 있다면 잎자루와 함께 따 와서 기념으로 보관해야겠다.

 

아직 반도 안 돌아봤는데 벌써 4시 반이다.

초반에 너무 여유를 부렸다.

항상 이런 식이다.

식물 탐사를 하다 보면 시간 안배라는 게 참 쉽지 않다.

수목원 문 닫는 시간은 6시지만 5시만 좀 넘으면 희미해진 빛이 사진작업을 방해한다.

발걸음을 재게 하여 양치식물원으로 간다.

양치식물에까지 관심을 둘 정도의 내공은 내게 없고 단지 그곳에 광릉요강꽃과 복주머니란이 있기 때문이다.

둘 다 귀한 꽃이라는 이유로 철제 울타리 속에 가두어 놓았다.

지난 번에 와서 디카에 담았던 광릉요강꽃의 그 요강 같은 꽃잎은 이미 형체를 잃었다.

대신 지난 번에 피지 않았던 복주머니란이 다른 철창 속에서 관람객들의 시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광릉요강꽃 울타리보다 그물눈이 더 촘촘해서 사진 찍기가 애매하다.

별 수 없이 접사거리에 있는 것이지만 그물눈을 피하기 위해 줌을 사용해서 사진 몇 장을 찍었다.

저 꽃도 다음 번에 오면 광릉요강꽃이 간 길을 따라 걷고 있겠지.

 

이제 녹음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짙어 가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앙상했던 나무들이 언제 저렇게 많은 잎을 내었는지 그 속도감이 놀랍기만 하다.

녹음은 광합성으로 배출되는 산소니 건강에 좋다는 피톤치드니 하는 거 굳이 상기하지 않아도 보는 것만으로 싱그럽고 청량하다.

저만큼의 거리에서 녹음의 그늘 밑을 느긋한 걸음으로 소요하고 있는 연인 한 쌍의 모습이 어제 동네 산에서 보았던 은대난초같다.

이름 모를 새들이 깊어가는 계절을 낭랑한 성문으로 장식한다.

이 숲속에서는 하늘도 경계 밖의 존재다.

청명한 하늘이 나뭇가지와 잎 사이로 점점 더 높아져만 간다.

이미 어두어진 전나무 숲 풀밭에서 감자난초 하나가 황갈색 꽃차례로 등불이 되기를 자처한다.

우리 둘은 이쯤에서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하기로 합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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