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푸석푸석 내리는데 오후에는 빗줄기가 꽤 굵어진다는 예보가 있었음에도 흥릉수목원에 들려보기로 한다.
한 시간 여 이동하는 동안에 비는 오락가락 하면서도 거세질 기미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최근 기상청의 잦은 오보 기록에 오늘 하루가 더 추가되기만을 바라면서 수목원 입구로 들어선다.
가장 먼저 약용식물원에 들린다.
우산을 받쳐든 채 식재된 식물들과 눈빛을 교환하고 있는 사람들 몇몇이 눈에 띈다.
우리에겐 귀찮은 비지만 개화나 결실을 준비하는 식물들에겐 달콤한 유혹이 아닐 수 없다.
빗방울 송글송글 맺혀 있는 잎들과 꽃들이 해맑은 표정으로 나를 대한다.
일부는 이미 열매 맺기에 열중이고 일부는 이제서야 꽃을 피우고 있다.
백선, 단풍마, 붓꽃, 흰붓꽃, 비짜루, 산달래, 작약, 조뱅이 등이 한참 개화중이다.
이름표가 붙어 있지 않은 석잠풀 앞에 선다.
작년에 동네 논둑에서 처음 보고 줄기가 곧고 꽃이 아름다워 그 이름을 마음에 새겼는데 일 년도 안 된 지금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그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유사종인 송장풀이란 이름만 머리 속에서 뱅뱅 돈다.
결국은 집에 와서 도감을 본 후에야 기억 되살리기 작업은 마무리되었다.
다음 코스로 이동하다가 담으로 조성된 철제 그물망을 뒤덮고 있는 포도나무의 잎 사이에 꽃차례가 살짝 숨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포도나무의 꽃은 처음 본다.
원추꽃차례인데 벋어나온 수술들로 인해 꽃차례가 뾰족뾰족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 모습이 본연의 아름다운 느낌마저 훼손하지는 못한다.
탱자나무의 성숙해 가는 열매와 백당나무의 꽃을 디카에 담는다.
백당나무야 이미 여러 번 그 꽃을 찍은 바 있지만 이곳에 있는 백당나무가 장식꽃으로 둘러싸인 안쪽의 양성화도 꽃을 피웠기에 다시 한 번 수고를 했다.
나도밤나무가 꽃차례를 잔뜩 가지 위에 올려놓고 개화준비에 여념이 없다.
왕벚나무에서는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는 버찌가 비에 젖어 반질반질하다.
그런데 왕벚나무 잎마다 벌레가 잔뜩 붙어 있어 다가가서 보니 벌레는 아니고 벌레집이다.
이 무단점유자의 정체를 모르겠다.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다가 구상나무에 수꽃이 꽤 많이 달려 있기에 역시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한참 사진을 찍고 있는데 빗줄기가 기상청 예보관의 체면을 살려주기로 마음을 정한 모양인지 갑자기 거세지기 시작한다.
바지 밑단이 축축해져 온다.
잠시 쉬기로 하고 휴게공간으로 가서 커피 한 잔 빼 들고 긴 의자에 앉는다.
커피를 홀짝이면서 바라보는 비에 젖는 수목원 풍경도 그런대로 괜찮다.
카메라를 꺼내 그 광경을 한 번 담아본다.
액정으로 옮겨진 풍경에는 빗줄기가 생략돼 있다.
그럼 그렇지, 아무나 그런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게 아니지.
내 옆에 계신 분은 끊임없이 이곳 저곳을 향해 셔터를 눌러댄다.
우산을 쓴 사람들이 나타날 때만 그쪽을 향해 카메라를 눈에 갖다 대는 걸로 봐서 인물이 들어 있는 우중 풍경 사진을 찍으시는 모양이다.
그들이 이쪽으로 눈을 돌리기 전에 재빨리 셔터를 누르는 게 여간 능숙하지가 않다.
호기심에 나도 저 멀리 걸어가고 있는 한 우산 아래 두 사람을 향해 촛점을 맞춰본다.
셔터를 눌렀는데 찰칵 하는 소리는 한참만에 들린다.
액정에 재생된 영상은 무모한 내 시도를 가감없이 재현해 놓았다.
짜식, 지 성능이 별로인 건 생각 안하고 나만 탓하다니...
더 기다려봐야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기에 그냥 경내를 돌아보기로 한다.
풀밭에 알쏭달쏭한 노란색 꽃을 피운 녀석이 있기에 디카에 담아본다.
다른 사람 하나가 옆에 와서 나하고 같은 작업을 하기에 꽃 이름을 물으니 좀민들레인 거 같다 하신다.
그런데 잎 모양이 전혀 민들레가 아니다.
민들레 종류에 대해서는 일전에 모두 그 특성을 요약하여 메모 노트에 기재해 놓은 적이 있는데 그때의 기억으로는 모든 민들레 종류의 잎은 깃꼴겹잎이었다.
그런데 여기 있는 녀석은 식물 전체가 거미줄 같은 솜털로 덮혀 있고 잎은 긴 타원형쯤 되어 민들레와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솜방망이 종류로 보인다.
나중에 이런 저런 자료들을 참조해 보았으나 끝내 이름을 알아내지 못한다.
자리를 뜨면서 우연히 휴게공간 쪽을 바라보는데 좀전의 그 작가인 듯한 사람이 얼른 카메라를 내리면서 눈도 같이 내린다.
에고, 졸지에 내가 작품 사진의 모델이 되었나 보다.
나중에 저분이 무지하게 유명해지고 이 사진이 졸지에 뜨게 되면 평론가들 사이에서 모델이 누군지에 대해 억측이 분분할지도 모르겠다.
그때가 되면 내 스스로 나타나 작가에게 초상권을 주장해야 하는 건가?
초본류 식물원에는 도깨비부채와 광릉골무꽃 정도가 꽃핀 모습을 주여준다.
인근에서 민대팻집나무의 꽃을 찍는데 사진이 영 시원치가 않다.
아무래도 더 이상은 무리인 거 같아 그만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괜히 왔다 싶은 생각도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포도나무와 민대팻집나무의 꽃은 처음 만나는 것이었으니 그런대로 소득은 있었다고 봐야 하는 건가?
나오다가 혹시 하고 들린 곳에 박쥐나무 꽃이 두엇 피어 있다.
이걸 놓칠 수야 없지 하는 마음에 디카는 꺼내들었는데 비가 심하다 보니 볕이 없어 사진이 영 시원치 않다.
이 각도 저 각도에서 수십 장 찍었는데 간신히 몇 장 건졌다.
마지막으로 주출입로 옆에 심어진 피라칸다가 하얀 꽃으로 하직인사를 하는데 기념사진 안 찍을 수가 없어 별 수 없이 또 셔터 몇 번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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