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산백련지 관람을 마치고 나와 버스 시간을 보니 1시간 20분 정도를 기다려야 한다.
마음씨 좋아 보이는 가게의 촌로께서 그 정도 시간 기다리느니 차라리 걷는 게 낫다고 충고하신다.
내 딴에는 버스 시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더위도 식힐 겸 막걸리라도 한 잔 하면서 기다리는 게 어떠냐는 은근한 장사속을 기대했었다.
그런데 내 의중을 벗어난 대답이 돌아오자 난 서리하다 들킨 아이처럼 머쓱해져서 고맙다는 인사만 드리고 가게를 나오고 말았다.
하긴 어차피 가게에서 막걸리를 마셨더라도 목포 행 버스가 있는 일로읍까지는 처음부터 걸어갈 생각이었다.
택시비 5,000원을 아끼기 위해서도 아니고 시간과 체력이 남아돌아서도 아니다.
그저 시골의 들길을 좀 걸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순진한 발상이 자신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했는지 태양은 때가 저녁 무렵임을 감안하지도 않고 무자비하게 열기를 뿜어대고 있다.
지금이라도 콜택시를 부를까 하다가 그만둔다.
연신 땀을 닦아내면서도 마음은 주변의 전답에 가 있다.
일순간 모종의 감흥을 자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내 자신이 의식의 촉수에 걸려든다.
들길과 주변 풍경이 자연스럽게 내 안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감정적 미동이 내부로부터 전혀 느껴지지 않자 나도 모르게 의도적으로 그런 분위기를 조성해보려 노력하고 있었나 보다.
그런 내가 갑자기 어색해진다.
날씨 탓인지, 세월 탓인지, 보잘것없는 경관 탓인지 모르겠으되 굳이 주범을 색출해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이미 빈 가슴에 들어선 서글픔이란 녀석이 은근히 정답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선심을 쓰려 했지만 담배 한 대 피워 무는 것으로 그 호의인지 악의인지를 간단히 묵살해버린다.
피곤한 탓인지 제철을 망각한 아지랑이가 포도 위에서 어른거리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모든 기공을 활짝 열어 만물에 내재되어 있는 기를 몽땅 유출시키고자 하는 게 태양의 의도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길가에 식재된 풀꽃들과 논밭의 곡물들은 그 정도의 시련은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다.
그 의연함 앞에 선 내가 졸지에 초라한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자연의 섭리에도 제로섬 게임 원리가 적용되는 건가?
어쩌면 인간의 입장에서 본 역경은 초목들에게는 호기인지도 모르겠지.
그렇다면 지구 환경 전체를 하나의 유기체로 본 가이아 이론인가 하는 게 맞을 수도 있을 거야.
복잡해진 머리를 흔들어 잡다한 상념들을 모두 털어내버린다.
길가에 핀 풀꽃들과 몇 마디 나누는 게 오히려 득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1. 설악초
2. 석류
3. 백일홍
4. 백묘국
5. 오스데오스펄멈(Osteospermum) 또는 디모르포세카(Dimorphotheca)
6. 노랑코스모스
노란색의 코스모스가 아니고 별도의 종이다.
7. 부용
8. 새삼
9. 미나리
10. 능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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