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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리비아의 풍경들

바람이 거센 날의 지중해

by 심자한2 2010. 11. 14.

지난 금요일에는 바람이나 쐬볼까 해서 바닷가에 나갔습니다.

 

이번에는 우려와 달리 휴가 후유증이 거의 없었습니다.

오자마자 리비아 내 지방 출장에서 돌아오기라도 한 것인 양 마음에 동요가 거의 없더군요.

지난 번 휴가 때는 리비아 복귀 후에 장기간 마음고생을 했던 터라 이번에는 그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못 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다행히도 그 예측이 빗나갔습니다.

그런데 해변에 나와 보니 불현듯 고국에서 보냈던 그 시간들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바다는 포효하는데 하늘은 바다가 그러거나 말거나 고요하기만 합니다.

수평선은 그 혼돈과 평화를 극명하게 가르면서 내게 이곳에서 보내야 할 시간들과

휴가 중 고국에서 보냈던 시간들에 대한 대비를 강조하는 것만 같습니다.

차라리 수평선이 무너져버린다면 하늘과 바다 중 어느 쪽이 득세를 할까 하는

쓸데없는 상상을 잠시 해보다 마는 것으로 수평선의 치기 어린 강요를 무시하고

맙니다.

 

해안 바위를 엄습하는 파도의 옥빛 물 색이 평소의 이미지와 달리 섬뜩합니다.

평소 그렇게도 내게 평화로운 이미지를 심어주던 그 물 색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 내가 평화를 느꼈던 것은 물 색이 옥빛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바다가 고요했었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 휴가 이전의 기억을 지워내는 걸 사명으로 삼고나 있는 듯이 밀려 온 파도가

지난 여름 내가 현장 직원들과 함께 휴식을 취하던 그 바위를 무차별 공격합니다.

 

무슨 일로 부아가 났길래 파도는 이리도 하얗게 날을 세우고 있는 건지.

어쩌면 이 파도는 심해저에서 긴 세월 침묵하고 있던 고대인들의 전설이

지루함을 못 이겨 한 순간 용틀임을 하는 건지도 모를 일입니다.

파도는 그 전설이 호소하고자 하는 절규를 전달하는 단순한 매개체일 수도

있을 겁니다.

 

전설의 절규는 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내지 못 한 채 해안 바위에 비누거품 같은 포말로

부서져버리고 맙니다.

그 헛수고가 안타까웠는지 파도는 차마 포말로 끝을 맺지 못 하고 바위에 부딪칠 때마다

단발마처럼 엹은 무지개를 그려냅니다.

어쩌면 전설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진심은 그 무지개일지도 모릅니다.

인생은 유한하지만 살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는 교훈을 무지개로부터 얻어내는

것으로 전설의 기대에 짐짓 부응해봅니다.

 

어차피 이렇게 부서질 줄 알면서도 파도는 먼 바다로부터 숨가쁘게 달려왔습니다.

예측되는 결말 때문에 과정을 등한시하는 우를 범하지 말 것을 파도가 설파합니다.

치열한 현실 적응은 그 자체로 삶의 원동력이 될 테니...

 

부서진 후의 파도는 다시 바다로 돌아갑니다.

회귀하는 파도는 조만간 다시 평정을 되찾을 겁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 위에 희망처럼 작은 어선들 몇 척 떠 있는 날 다시 이 바닷가에 나와 바다의

속내를 다시 한 번 읽어보려 노력해봐야겠습니다.

 

몇몇 현지인들이 건너편 낮은 바위 위에서 한참을 서 있습니다.

종교의식이라도 되는 양 크고 작은 물방울로 변한 파도의 잔해를 온몸으로 맞으면서

저들은 무슨 상념에 젖어 있을지 궁금합니다.

세재 거품 같은 포말에 의식 속에 켜켜이 쌓여 있는 속세의 분진이 저절로 씻기기를

기대하고 있는 건 혹시 아닐는지.

그렇다면 나부터 기꺼이 저 낮은 바위 위에 서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바위 위에서 얼쩡거리다 큰 너울이 만든 거센 물거품에 제대로 일격을 당했습니다.

순간 몸을 돌리긴 했지만 좌반신은 속수무책으로 그 공격의 재물이 되었습니다.

즉각적으로 피부까지 축축해진 게 느껴졌으니 물거품의 세기가 보통이 아니었음을

짐작 하고도 남습니다.

마음까지 축축해져 그냥 숙소로 돌아갈까 하다가 기왕 나들이 나온 김에 한 군데를

더 들리기로 합니다.

젖은 채로 10여 분 차를 몰아 그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입니다.

제법 높은 언덕인지라 가시거리가 훨씬 더 길어집니다.

 

이곳 바다는 중세 무도회복의 주름 장식 같은 무늬로 내게 환영의 예를 표합니다.

좀전까지만 해도 극악무도한 흉악범 같던 바다에 대한 인상이 일거에 사라졌습니다.

바다는 이제서야 내가 그리던 한 폭의 그림이 되어주었습니다.

관점의 차이는 주관적인 것만은 아닌 듯합니다.

객관적인 환경의 변화도 이렇게 관찰대상에 대한 느낌을 바꿔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이렇게 멀찌감치에서 사물이나 사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각득이 내일의

내 일상에까지 그대로 이어지기를 기대해봅니다.

 

 

파도가 해안으로 다가올수록 물 색은 점점 옅여집니다.

날카롭게 날을 세웠던 기세도 시간이 지난 사랑처럼 점점 무디어집니다.

이 세상에 영속적인 것은 절대로 없다는 진리를 재차 강조하는 파도의 인내는

그만큼 무감각한 우리네 인간들에 대한 연민일지도 모릅니다.

 

아, 너무 말이 많았습니다.

어쩌면 파도는 그 포효로 내게 종용하고자 했던 건 역설적으로 침묵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생각도 너무 많았습니다.

파도는 내 시선을 저 하늘로 유인함으로써 무념무상을 선물로 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는 뒤늦은 후회가 입니다.

 

좀전에 바닷가 바위 위에 서 있던 현지인들처럼 그저 그림의 일부가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었을 텐데 난 어리석게도 나와 자연을 굳이 분리시키려 한 건 아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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