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산행지는 명지산이었습니다.
집에서 버스로 사릉역까지 이동한 후 사릉역에서 경춘선 전철에 올랐습니다.
예전에는 이 경춘선이 적어도 휴일이면 등산열차나 다름 없을 정도로 등산객
들로 만원이었는데 어제는 그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제 휴가철도 끝났고 단풍은 아직까지 신고식조차 하지 않았기에 지금이 어쩌면
산행 휴지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평역을 나와 길 건너편으로 가면 가평터미널 가는 군내버스가 있습니다.
그걸 타고 터미널로 이동해서 보니 명지산 들머리인 익근리를 경유하는
용수동행 9시 30분 버스 시간까지 무려 한 시간이나 남았더군요.
명지산을 가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군내버스가 바로 이 시간대의
버스이기에 버스는 항상 만원입니다.
그래서 등산객들은 버스가 도착하기 훨씬 이전부터 버스 승강장 옆에 배낭으로
긴 줄을 만들어둡니다.
이전의 경험으로 이걸 알기에 나도 그 줄 끄트머리에 내 배낭을 내려놓았습니다.
아침도 먹고 산행 중 먹거리도 좀 사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시간이 되어
대기줄로 가서 기다리니 군내버스가 아닌 청량리 가는 1330번 좌석 버스가
오더군요.
마침 근처에 있던 터미널 관계자에게 물으니 이 시간대 등산객이 너무 많아
군내버스로는 역부족이기에 임시 차량을 배차한 거라 합니다.
좌석버스임에도 서서 가는 사람들로 만원이었으니 등산객들이 참 많기도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40여 분 후 익근리 명지산 입구에 내리자마자 곧 바로 등산에 돌입합니다.
때 마침 도착한 산악회 버스 한 대가 쏟아낸 등산객들에 섞여 걷습니다.
난 거의 대부분 나홀로 산행이지만 이 날은 동행이 있었습니다.
터미널에서 만난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이분은 환갑의 나이임에도 몸이 상당히 가벼웠습니다.
그 경쾌한 발걸음을 뒤쫓느라 고생 좀 했지요.
중간에 평소에 봤던 것과 잎 모양이 다소 차이가 나는 투구꽃 종류 하나를
만나면서 그분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 꽃을 찍고자 잠시 숨을 돌리면서
그분에게 먼저 가시라고 권했습니다.
사실 내 산행 목적은 야생화 탐사이기에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이 아닌
바에야 동행을 만나게 되면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습니다.
내가 들머리 입구에서 내 산행목적에 대해 말했던 것을 기억하셨는지
다행히도 그분이 기다리지 않고 가던 길을 계속해서 가시더군요.
마음의 여유를 갖고 천천히 주변 식생들을 살피면서 올라가다가 명지폭포를
만납니다.
명지폭포는 등산로 좌측으로 600미터를 내려가야 있습니다.
폭포야 이 산 저 산에서 많이 본데다가 그 경사로를 왕복하기가 싫어서
그냥 지나치려는데 그 폭포 쪽에서 그분이 나타납니다.
거기서 나를 기다리다가 하도 안 오기에 그냥 올라오는 중이라고 하더군요.
할 수 없이 주변 야생화 관찰은 포기하고 그분과 함께 등산에 열중합니다.
명지산삼거리에서 등산로는 둘로 갈립니다.
하나는 명지4봉을 거쳐 명지1봉으로 오르는 길인데 2.4km이고 다른 하나는
곧 바로 명지1봉으로 오르는 길인데 1.8km입니다.
그분이 먼저 후자의 길을 선택했는지 좌측으로 방향을 틀기에 난 그냥 뒤를
따랐습니다.
거기서부터 얼마쯤 가다보니 등산로가 고개를 바짝 쳐듭니다.
그분은 새는 아니더라도 날다람쥐 수준은 되었습니다.
보폭이 느린 내가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헥헥거리면서 보조를
맞췄는데 8부 능선쯤 가서는 드디어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몇 번인가 다리를 쉬면서 숨을 고를 때마다 그분에게 먼저 가라고 말씀을
드렸지만 그분은 자기도 힘드니 쉬어 가겠다며 끝까지 동행을 포기하지
않을 태세였습니다.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하다 보니 결국 그분도 내 보폭에 실망을 하였는지
먼저 목계단을 오르더니 위쪽 산모퉁이로 사라지더군요.
내 원래의 보속을 되찾으니 또 다시 주변 식생들을 관찰할 여유가 생깁니다.
투구꽃, 휜진범, 산박하, 새끼꿩의비름 등이 심심치 않게 보이긴 했지만
실망스럽게도 그외에 특별한 야생화는 눈에 띄지 않더군요.
명지1봉에 오르니 일단의 산악회 사람들이 군데군데 진을 치고 식사를
하느라 시끌벅적합니다.
명지1봉은 명지산의 정상입니다.
정상의 바람은 한겨울의 칼바람은 아니었지만 제법 한기를 품고 있더군요.
준비해간 바람막이 점퍼를 꺼내서 반팔 상의 위에 걸칩니다.
그런데도 몸은 으슬으슬 춥고 간간이 코를 훌쩍이는 내 모습에 그제서야
비로소 내게 감기 몸살 기운에 있다는 걸 느낍니다.
간밤에 소파에서 티브이를 보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는데 초가을 날씨가
자신을 무시한 게 못마땅했던 모양입니다.
나중에 다시 만난 그 동행인은 자신도 정상에서 상당한 한기를 느꼈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 날씨는 이미 지리했던 여름의 잔재를 거둬낸 모양입니다.
그러고 보니 야생화가 이렇게 드문 것도 모두 환절기 탓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캘린더에서 느끼지 못했던 계절의 변화를 명지산이 이 날 확실히 각인시켜
주었습니다.
계곡물도 현저히 줄었고 몇몇 수종은 이미 일부 잎새들로부터 여름 색을
빼내버렸습니다.
한참을 지속할 것 같던 여름이 어느새 가을의 위세에 밀렸으니 수목들의
복색 변화가 본격화될 날도 그다지 멀지 않은 듯합니다.
문득 금번 겨울에 내 발은 어느 심산의 눈을 발고 있을지 아니면 리비아의
먼지 같은 황토흙을 밟고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인생은 계절 바뀌듯 필연에 의해서만 흐르지는 않는 거라는 생각에 잠시
숙연해집니다.
금전적으로 볼 때 전혀 실익이 없는 이 야생화 탐닉에 대한 내 취미도
어쩌면 일종의 현실도피일 겁니다.
그나마 이 취미생활로 인해 정신적인 윤택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걸
위안으로 삼기에는 현실의 물질적 척도에 대한 내 집착이 너무 강한 건
아닐까 하는 자괴심이 가끔 입니다.
그러기에 이 잦은 자연과의 소통에 심심치 않게 회의를 느끼나봅니다.
허기가 느껴지지 않아 점심은 포기하고 대신 가져간 커다란 사과 하나를
손에 들고 명지2봉으로 향합니다.
과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은데다가 사과알이 매우 굵어서 걸으면서 그걸 전부
먹어치우는 것도 고역이더군요.
몸은 계속해서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한 촉감으로 내게 무리하지 말라는
경고를 전합니다.
그 경고를 무시하고 명지2봉과 명지3봉을 지나 귀목고개까지 계속 진행합니다.
귀목고개에서 좌회전을 하면 가평의 상판리 방향이고 직진을 하면 귀목봉입니다.
원래의 일정은 이 귀목고개에서는 가평쪽으로만 내려갈 수 있기에 귀목봉을 거쳐
강씨봉까지 가서 포천 방향으로 하산하는 것이었습니다.
가평보다는 포천 쪽이 집에 가기 훨씬 더 편하거든요.
그런데 이쯤에서 그만 신체의 경고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상판리 쪽 내리막길로
들어섰습니다.
이 길은 이전에 여러 번 산행 들머리로 삼았던 곳이라 익숙합니다.
여전히 바뀐 계절은 많은 야생화들을 이미 세월의 뒤안으로 옮겨놓았습니다.
찍을 만한 것들이 없으니 하산길이 지루하기만 합니다.
하산을 완료해서 버스승강장에 붙어 있는 시간표를 보니 가장 가까운 현리행
버스는 5시 45분에 있더군요.
한 시간 이상 남은 시간을 의자에 앉아 빈둥거리기 싫어 도로를 따라 걷기로
합니다.
가다가 5시 45분 버스를 만나면 그때 타면 되니까요.
그렇게 두어 정거장을 걷는데 왼편에서 오전의 그 동행인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명지1봉 8부능선쯤에서 헤어진 그분을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분은 명지3봉에서 연인산까지 3시간여를 걸은 후 정상을 찍고 가평 백둔리
쪽으로 하산하다가 길을 잘못 들어 이곳 상판리 쪽으로 내려오게 되었다더군요.
또 다시 우리는 동행을 합니다.
그분은 걷는 걸 좋아하시는지 내친 김에 현리터미널까지 걸을 기세였습니다.
그곳에서 현리터미널까지 얼마나 먼지를 알려드린 후 적당한 시점에 걷기를
멈추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가 당도하더군요.
현리에 도착해서 그분과 헤어지고는 또 다시 버스를 세 번이나 더 갈아타고서야
집에 도착할 수가 있었습니다.
비록 총 길이 12km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처음으로 하는 명지산 종주인지라 마음이
뿌듯해야 하는데 별로 그렇지가 않더군요.
아마도 신체 컨디션이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던 탓인가 합니다.
기록에 대한 자부심도 건강에 대한 염려 앞에서는 무용지물임을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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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지1봉 정상석.
인증샷 날리는 사람들 때문에 어느 산에서나 정상석 한 번 찍으려면 시간이 꽤나 걸립니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먼저 찍었답니다.
명지2봉에도 정상석은 있는데 명지3봉에는 정상석이 없습니다.
예전 같으면 산행기를 적기 위해 풍경 사진 참 많이도 찍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썩 마음에 드는 풍경이 나타나지 않는 한 수고를 아끼게 되더군요.
산행기에 대한 관심이 야생화 탐사에 대한 애착에 밀린 결과인 것으로 보입니다.
명지2봉에서 내려다 본 가평군 백둔리 풍경입니다.
가까운 하늘과 먼 하늘의 색감이 아주 대조적입니다.
이날 명지산 위 하늘에는 이렇게 구름이 잔뜩 껴 있었지요.
그래도 경기도에서 2번째로 높은 산인지라 명지산이 계절의 변화를 선도하고 싶었나 봅니다.
명지3봉에서 다시 한 번 백둔리를 당겨보았습니다.
현리에서 의정부행 좌석버스를 타고 포천의 봉수리에서 내렸습니다.
정류장에서 잠시 서성이고 있는 한 아주머니께서 7번 버스를 기다리느냐고 물으시더군요.
그렇다고 하니 좀전에 그 버스가 떠났다고 알려주십니다.
광릉내 가는 이 버스의 배차간격은 30~40분이니 20~30분은 족히 기다려야 할 신세가
되었네요.
길 건너편에 있는 두 채의 식당과 국도 위에 걸쳐진 신호등의 불빛이 처연합니다.
시골의 어둠은 유난히 농도가 짖은 것 같습니다.
도시처럼 인위적인 불빛이 별로 없어서 그럴 겁니다.
땅거미의 본질은 눈 앞에 두고도 어색해 하는 건 그만큼 내가 도시생활에 익숙해져
있다는 걸 반증하고 있습니다.
불현듯 다시 도시로 돌아가기가 싫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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