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요리에 관심이 있어 오신 분들이 계시면 이 글 안 읽으시는 게 낫습니다. ^^)
아시는 분이야 다 아는 얘기지만 대부분 회교국가에서는 금요일이 휴일입니다.
오늘이 목요일이니 휴일 이브네요.
내일 한 현지인의 안내로 우리 현장 직원 둘과 함께 트리폴리에서 2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해변으로 놀러 가기로 했었는데 이 현지인이 갑자기 약속이 생기는 바람에
휴일의 일정이 졸지에 망가져버렸습니다.
간만에 해수욕 한 번 해볼까 했는데 오랜만의 기대가 무산되었지만 뭐 크게 상심하지는
않습니다.
지중해야 혼자서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보러 갈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왔으니까요.
내일이 한가하다 생각하니 괜스레 오늘 평소와 다른 뭔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서 택한 게 요리입니다.
이제까지도 간간히 요리를 안 한 건 아니지만 언제부터인가 혼자 먹기 위해 요리
씩이나 하는 게 사치라는 생각에 빵 쪼가리나 라면으로 대충 한 끼 식사를 때우곤
한 적이 훨씬 많았기에 하는 말입니다.
음... 제가 요리라고 했네요.
그런 용어를 쓸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럴 듯한 요리랍시고 해본 적이 거의 없었거든요.
적당한 대체 용어가 생각나지 않으니 그냥 요리라는 용어를 빌려쓰기로 합니다.
무슨 요리를 해볼까 생각하다가 간편한 스테이크가 물망에 올랐습니다.
간편하다고 했는 내 방식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고기 사다가 아무런 양념 없이 전기오븐에 굽는 것으로 요리 끝이니까요.
그래도 재료를 제대로 샀다는 가정 하에 내 초간편 요리가 어느 음식점 스테이크
보다 못하지 않더군요.
혼자 먹는 건데 요모조모 잴 것 뭐 있겠습니까?
바로 차 몰고 소고기 사러 나갔습니다.
운전 중에 어제 시내 모처에 있는 대형 슈퍼마켓에서 냉동 새우를 사다 놓은 게
불현듯 생각이 나더군요.
이런, 왜 불과 하루 전의 일을 먼 과거 일처럼 힘들게 기억해내야 하는 걸까요?
내가 요즘 이렇습니다.
다시 돌아갈까 하다가 기왕 나온 김에 야채나 좀 사야겠다 싶어서 인근에 있는
청과물 상점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차 바퀴따라 졸지에 메뉴가 바꾸는 순간입니다.
철이 철인지라 상점마다 어른 머리통보다 훨씬 큰 수박들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있더군요.
하나 사고 싶어도 한두 조각 먹고 나면 나머지를 넣을 냉장고 공간이 마땅치 않아
포기하고 맙니다.
작은 냉장고 달랑 하나로 버티고 있거든요.
수박 사봐야 8할 이상은 그런 이유로 버려질 게 뻔합니다.
그렇게 버려진 야채나 과일이 이미 꽤나 많았거든요.
힘들게 키운 농작물을 버리는 게 아까운 건지 아니면 쓰레기 버리는 행위가
싫은 건지는 나도 모르겠습니다.
이곳은 음식물 쓰레기통이 없음은 물론이고 일반 쓰레기를 버릴 장소도 마땅치
않습니다.
오직하면 내가 일 주일에 한 번 돌아오는 휴일에 곡 해야 할 일 중 하나가 이 밀린
쓰레기 버리기이겠습니까?
혼자 사는데도 웬 쓰레기는 그렇게 많이 나오는 건지, 원.
목표로 한 상점에서 양파, 호박, 오이, 레몬, 토마토 대여섯 개씩 사왔습니다.
한 번 먹을 분량만 사면 좋으련만 그렇다고 각가 한 개씩만 살 수야 없다는 건
뭐 다들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드디어 요리 시작입니다.
물론 요리책이란 건 없습니다.
인터넷을 찾아보고 제시된 조리법을 따라해보는 방법도 있지만 이전의 경험에
의하면 그러느니 차라리 내 맘대로 식 요리에 도전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따라 한다고 다 요리사가 의도한 음식맛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쯤이야 요리 초보자
라면 다 아실 겁니다.
책에서 지시한 대로 따르든 제멋대로 대충 하든 어차피 내 손을 거친 요리일 테니
둘 다 한참 자격 미달이 되리란 건 뻔합니다.
우선 냉동새우 7마리를 꺼냈습니다.
뭐 요리를 해보지 않아 적량을 모르니 대충 이 정도면 됐다 싶은 마릿수를 선택한 겁니다.
그런 다음 양파, 호박, 감자 하나씩을 물에 대충 씻어 위 사진과 같이 썰었습니다.
깍뚝 썰기인지 뭔지를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해서 내가 먹는 건데 뭐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레몬이야 나중에 요리가 다 된 후에 뿌릴 것이니 그대로 둔 거지만 토마토는 이전
같으면 같이 썰었겠지만 이번에는 재료 양이 너무 많다 싶어 나중에 필요하면 그냥
먹기 위해 그대로 놔뒀지요.
재료에 일단 칼이 닿은 후에 일부를 남겨두면 설사 냉장고에 넣어둔다 해도 결국은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마는 건 그간의 내 경험이 내게 남겨준 교훈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것들 살 때도 크고 실한 것보다는 한 번 먹기에 적당한 크기가 선별 기준이
되었지요.
우선 냄비에 올리브유를 적당히 붓고 약간 달군 후에 어디서 들은 건 있어 가지고
먼저 생선 종류인 새우부터 볶았습니다.
어느 정도 볶다보니 냉동새우를 씻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 탓에 얼음이 녹아 물이
많이 생기더군요.
이건 아니다 싶어 그 물을 따라버리고 올리브유를 적당량 다시 부었습니다.
이곳이야 뭐 올리브나무가 지천인 나라라서 올리브유도 흔하니까요.
그런 다음 썰어놓은 야채를 넣고 같이 볶았습니다.
카레가루 겉봉에 있는 설명문에 따르면 어느 정도 익을 때까지 볶으라고 했는데
제 눈으로는 어느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느 정도라는 건 이제 전적으로 제 감에 달린 겁니다.
제 무딘 감각이 <<어느 정도>> 익었다고 지시했을 때 물을 자작하게 부었습니다.
사실 뭐 자작하게의 정도도 난 모릅니다.
사진에서 보이는 정도면 자작한 건가요?
아무래도 좀 많다 싶긴 하네요.
많으면 좀 더 졸이면 되지요 뭐.
야채가 완전히 익었다 싶을 때 이전에 본사에서 받았던 오뚜기 카레가루 한 숟가락을
넣으면서 잘 저어주었습니다.
저번에는 두 숟가락을 넣었는데 오늘은 웬지 한 숟가락이 적당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한 숟가락 분의 카레를 아끼기로 했지요.
결과적으로는 한 숟가락으로는 좀 작은 것 같더군요.
상표에 그려진 오뚜기 얼굴이 제 형편 없는 눈썰미를 비웃고 있네요.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만든 요리를 저 악동과 같이 나눠 먹을 일은 없으니 괘념치 않기로
합니다.
이제 대충 소스는 완성되었습니다.
사실 말이 소스지 밥량이 적은 제게는 이게 메인 요리나 마찬가지입니다.
에효, 맛이 어떨라나.
이전 경험으로 볼 때 재료가 무엇이든지 간에 카레가루만으로 대충 카레 맛은 났었으니
별로 걱정은 되지 않습니다.
배가 좀 고프면 요리 결과에 관계 없이 맛이 더할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 아침, 점심 두
끼나 굶었는데도 전혀 허기가 느껴지지 않네요.
그렇다고 하루 세 끼 모두를 굶어본 적은 없어 최소한 한 끼라도 먹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이런 저녁거리를 준비하고 있는 겁니다.
사실 뭐 천하제일의 요리사라 한들 혼자 먹기 위해서 땟갈 나는 요리를 하지는 않지
않을까요?
주부들도 가족들이 모두 늦게 들어오는 날 혼자 먹는 저녁은 남은 음식 치우기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들은 바가 있는데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아주 간단한 거 하나 하는데도 이렇게 신경이 쓰이니 말입니다.
내가 시큼한 걸 좋아하기에 좀전에 오랜 만에 레몬도 몇 개 사왔었지요.
오랜 만이란 말은 이전에 딱 한 번 레몬을 산 적이 있었는데 한 조각 사용하고 나머지를
모두 냉장고에 넣어두었었지요.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서 모두 곰팡이가 피더군요.
그 뒤로 두어 달만에야 레몬을 다시 한 번 더 사본 것이니 오랜만인 거 맞지요?
이곳 식당에서 생선이나 고기 요리에 레몬즙을 뿌려먹었을 때 상큼한 맛이 참 좋았었는데
이게 카레 속에서도 같은 미감을 줄지 아주 궁금해하면서 즙을 짜넣었습니다.
남은 건 밥뿐이네요.
밥이야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니 두어 숟가락만 펐습니다.
제가 맥주컵으로 반 정도의 쌀로 밥을 하면 세 끼는 먹거든요.
너무 적게 하다 보니 한국에서 사온 밥솥이 자존심 상한다고 자꾸 인상을 쓰는 것 같아
언제부터인가는 한 번에 한 컵 정도는 합니다.
그래봐야 전기밥솥 바닥을 모두 덮지는 못하더군요.
밥량은 적어도 카레 비빌 것을 생각해 그릇은 큰 것으로 준비했습니다.
거기다가 이번 휴가 때 가져온 김인가 미역인가를 기름에 볶은 것을 보태니 제
기준으로 볼 때 그런대로 훌륭한 저녁식사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카레를 밥 그릇에 넣으려다 보니 설거지 거리 하나라도 줄여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
그냥 밥을 카레가 있는 냄비에 부어버렸습니다.
젓가락도 내어놓았지만 마찬가지 이유로 쓰지 않기로 합니다.
어쩌다 이곳에서 혼자 살게 되면서 가장 뼈저리게 느낀 것 중의 하나가 난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는 것이었지요.
청소, 빨래, 요리, 설거지, 육아, 남편 내조....
정말 우리나라 여자들은 철인입니다.
이런 각성이 내가 언젠가 한국으로 다시 돌아갔을 때 일상적인 행동으로 이어질지는
모르겠습니다.
뭐 저야 심성이 워낙 고와서인지 결혼초부터 자진해서 이런 일들을 어느 정도 분담은
해주었었습니다만 지금 생각하니 그건 생색 수준에 불과했던 것 같네요.
어쨌든 설거지를 조금이라도 줄이겠다는 생각을 하니 뜬금 없이 여성 산악인
남난희씨가 떠오릅니다.
물론 그분을 직접 본 적은 없으니 이름만 떠오른 거지요.
백두대간이란 용어가 생소하던 시절에 76일에 걸쳐 태백산맥을 단독종주했던
분입니다.
직접 그분 책에서 읽은 건 아니지만 언젠가 티브이에서 그분 다큐멘터리를 방영할 때
보았던 일화 중 하나가 남난희씨가 태백산맥 종주 중 하도 힘이 들어 조금이라도 배낭
무게를 줄이기 위해 숟가락의 손잡이를 부러뜨린 채 갖고 다녔다는 겁니다.
저야 뭐 그분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그렇다고 조금이라도 설거지 거리를 줄이려는
얄팍한 술수를 나무라지는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사람은 경제적 동물이니까요.
윈도우 미디어 플레이어에 담아 놓은 음악들 들으면서 내 요리를 조금씩 음미해봅니다.
과연 예상대로 별로더군요.
그래도 기본적으로 카레맛이 배어 있으니 먹을 만은 했지요.
전 요리랍시고 할 때 조미료, 소금, 간장은 전혀 쓰질 않습니다.
설탕은 김치 볶을 때 약간 사용하는 정도구요.
그렇다고 건강을 위해 짜고 단 것을 평소 가린다는 건 아닙니다.
그저 요리를 할 때만 그렇다는 거지요.
이것들이 몸에 좋지 않다는 이유에서 비롯된 버릇이겠지만 제 입맛이 까다롭지 않아서인지
음식맛이 썩 좋지 않아도 꾸역꾸역 잘 먹는다는 게 더 큰 이유일 겁니다.
휴, 이렇게 해서 또 한 끼를 때웠네요.
이런 아무 영양가 없는 글을 왜 올렸냐구요?
에고 이런 것도 제게는 빈 시간을 채우는 방법 중 하나라는 점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밤이면 총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드는 나라에서 방 열 개쯤 되는 집에 혼자
살아보시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갈 겁니다.
휴가에서 복귀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몇 개월씩이나 남은 다음 휴가를
그리고 있으니 말입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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