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08.04.22일)의 목적지는 명성산이다.
작년 10월에 그곳에 가서 억새밭 안과 근처에서 자주쓴풀, 쑥방망이, 용담 등을 처음으로 보았던 기억이 있는 곳이다.
아침 6시에 집을 나선다.
복두산을 지나온 바람이 코 끝을 간질인다.
밤새 꽉 막힌 공간의 탁한 공기를 감내하느라 고생했던 코가 반색을 하며 후각을 활짝 연다.
어디선가 꽃 내음도 전해져 오는 것 같다.
동네에서 버스를 타고 뱅이삼거리에서 1-1번으로 갈아탄 후 의정부 구 버스터미널에서 하차한다.
인터넷으로 산정호수 가는 버스인 138-6번의 시간표를 끝내 알아내지 못했기에 버스가 올 때까지 마냥 기다려야 한다.
정류장 이름은 구 버스터미널이지만 내가 타려는 버스는 이 터미널을 경유하기만 하기에 여기서도 배차시간을 알아낼 수는 없다.
예전에 산정호수에서 보았던 시간표에 대한 기억으로는 배차간격이 대략 1시간 정도이었으니 최대 그만큼의 시간만 기다리면 될 것이다.
7시부터 기다리는데 30분이 지나도 버스가 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머피의 법칙이 생각나서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어본다.
머피의 법칙은 오늘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담배를 2대나 더 피우고서야 버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56분을 길거리에서 아무 소득 없이 허비해야만 한 게 좀 아깝긴 했지만 어쩌랴, 우리나라 지방행 교통편 사정이 그러한 걸.
종점인 산정호수 주차장에 내려 곧장 들머리로 이동한 시각은 7시 40분이다.
작년에 두 번이나 왔던 곳이라 산행 코스는 익숙하다.
입구에 있는 음식점 화단에서 지면패랭이와 금낭화가 내 방문을 축하라도 하듯이 빙그레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들머리에서부터 어디선가 이름 모를 산새 소리가 들려온다.
새소리가 계곡물 떨어지는 소리와 어우러져 3시간 40분 간의 대중교통 이용 시간으로 구겨졌던 마음에 다림질을 해준다.
이곳 등산로는 입구에서부터 계곡이 오른쪽에서 동반한다.
수량이 그다지 풍부하지는 않지만 낙차가 있는 곳이 많아 떨어지는 물 소리가 청량감을 전해준다.
역시 이곳에서도 가장 먼저 제비꽃 종류가 눈에 든다.
고깔제비꽃과 알록제비꽃이다.
알록제비꽃은 얼마 전에 천마산에서 찍은 사진이 잘못 나와 모두 버렸기에 다시 찍었다.
벚나무 종류로 보이는 건 총경이 있고 긴 소화경에 털이 없는 것으로 보아 개벚나무다.
병꽃나무에 핀 꽃은 거의 모두가 황록색인 것으로 보아 개화한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다.
이제 시간이 흐르면 저 꽃들도 붉은색으로 변할 것이다.
여기서도 바위 틈새에는 거의 어김없이 매화말발도리가 자태를 뽐내고 있다.
병꽃나무도 매화말발도리도 모두 꽃이 하나도 시든 게 없을 정도로 싱싱하다.
이곳 환경이 좋아서인지 아니면 핀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냥 전자 때문인 것으로 생각키로 한다.
천마산에 있는 개별꽃 종류는 상당수가 비슬개별꽃이었는데 이곳에서는 거의 모두가 꽃잎이 5장이고 꽃잎 끝이 오목하게 패였으며 꽃자루에 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순수한 개별꽃들이다.
각시붓꽃은 어디에서나 흔한 식물인지 여기서도 군데군데 눈에 띈다.
나무로는 단풍나무가 매화말발도리 다음으로 많은 것 같다.
계곡 옆에 자라고 있는 팥배나무와 생강나무도 새싹을 내느라 여념이 없다.
조팝나무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무슨 조팝나무인지 알아보기 위해 잎 모양을 조사하다가 그만두고 만다.
조팝나무에 대한 공부가 깊지 않아 아직은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에서는 진달래가 이미 꽃을 모두 떨궈냈는데 여기서는 이제 한창이다.
이곳이 아무래도 북쪽이다 보니 개화시기가 늦은 탓이리라.
매화말발도리가 심심치 않게 보이기에 몇 번이나 디카 셔터를 눌러봤는데 모두 다른 나무들이 배경으로 같이 잡혀 멋있는 사진이 되지 못해 나중에 다 버리고말았다.
어느 정도 산을 오르다보니 유난히 바위가 많은 계곡에 돌단풍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역시 식물이란 자연 상태에 있어야 제멋이다.
계곡의 바위 틈새마다 점유하고 있는 돌단풍의 만개한 꽃들도 싱그럽기 그지없다.
훌륭한 모델이 많아 별 수 없이 또 카메라를 꺼내들었지만 사진 실력 부족으로 육안에 의한 시각적 느낌이 필름에 그대로 담기지는 못해 안타깝기만 하다.
갈래조각이 12개 내외인 것을 큰돌단풍이라고 한다던데 아무리 눈여겨봐도 큰돌단풍은 눈에 띄지 않는다.
등산로 좌우를 살피랴, 간간이 계곡에도 시선을 주랴, 눈을 들어 나무들도 쳐다보랴 바쁘기만 하다.
의도하지 않아도 산행 속도는 자연히 느려질 수밖에 없다.
등산이 목적이 아니기에 정상을 밟지 못한들 어떠랴 하는 마음이 발걸음에 그대로 전달되었는지 보폭이 느긋하기만 하다.
등산이 아니라 산책 수준의 산행이다 보니 자연히 마음에 고이는 여유도 그만큼 더 커진다.
그렇게 거의 한 시간 반 정도를 걸은 후에 등룡폭포가 나타난다.
입구에 있는 비선폭포에 비하면 규모가 좀 더 크다.
용이 폭포의 물안개를 타고 승천하였다는 전설을 간직한 곳이다.
용은 승천하였어도 그 포효는 여전히 남았는지 소로 직하하는 물소리가 제법 요란하다.
앞쪽에는 단풍나무가 서 있고 좌우로 산벚나무와 진달래가 시립해 있으며 위쪽으로는 소나무가 둘러 나 있어 제법 근사한 풍경을 연출한다.
용이 승천한 뒷자리가 허전했는지 돌단풍이 폭포 사면에 듬성듬성 박혀 있어 미려한 경관 유지에 톡톡히 일조를 하고 있다.
이곳에서부터는 눈에 띄는 특별한 풀꽃나무들이 거의 없다.
병꽃나무들도 아직 개화전이라 아래쪽에서는 확성기 수준이던 꽃들이 여기서는 무대 마이크 모습에 불과하다.
매화말발도리 꽃도 흰 공 모습으로 아직 깔때기 모습을 연출하지 못하고 있다.
어쩌다 솜나물이 한두 개씩 눈에 띌 뿐이다.
이럴 때는 뭐 등산하러 온 셈치면 되니 산행은 이래서 좋다.
공기는 여전히 맑고 신선하다.
우측으로 직진하는 계곡을 두고 등산로는 좌측으로 굽는다.
아까부터 저만큼에서 먹구름이 몰려오는 듯하더니 급기야 한두 방울씩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인터넷으로 확인해 보니 서울, 경기 지방은 오늘 흐리기만 하고 비는 내리지 않는다 하여 명성산을 찾게 되었는데 버스 안에서 뉴스를 들으니 양이 많지는 않지만 간간히 비소식이 있을 거라 했다.
우산을 가져오지는 않았지만 설사 비가 오더라도 맞을 만하리라 생각하고 그냥 산행을 강행키로 했다.
야후의 날씨 코너는 실시간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모양이다.
이렇게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여 내 여행을 곤혹스럽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빗방울이 맨살에 닿는 감촉은 있으나 옷이 젖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억새밭 근처에 이르니 제법 양이 많아진다.
억새밭 입구에는 전에 없던 초소가 하나 뎅그러니 놓여 있다.
명성산은 군 부대의 사격장이 있는 곳인데 사격 훈련이 있는 날은 억새밭 위쪽에 있는 팔각정에서부터 정상까지 통제구역이 된다.
이곳에 간이 초소가 생겼다는 건 아마도 이제 이곳 억새밭조차도 통제구역에 포함되었다는 뜻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어쨌든 지금의 내게는 이 초소가 훌륭한 은신처가 된다.
안으로 들어가니 마른 억새가 바닥에 깔려 있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면서 이곳에서 점심을 해결하기로 한다.
날씨가 좀 쌀쌀해진 듯하여 잠바를 꺼내 걸친다.
점심을 다 먹고 나서도 비가 그치질 않는다.
등산로 저편에 있는 물푸레나무가 잎과 꽃망울을 동시에 올리고 있다.
그들에게는 이 정도 비라도 개화를 준비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겠지.
그냥 하산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내친 김에 정상까지 가리라는 오기가 생긴다.
이전에 이곳을 두 번이나 방문했을 때는 사격훈련 때문에 팔각정까지만 등산했고 정상은 한 번도 밟아보지 못했는데 오늘은 사격훈련이 없는 듯하니 정상을 정복할 절호의 기회다.
이런 호기를 놓치기가 아깝지 않냐는 마음이 비에 젖는 불편 정도는 감수하라고 부추긴 결과이다.
막 출발하려는데 풀섶에서 지장보살이라 불리는 풀솜대가 꽃대를 올리고 있는 모습이 관찰된다.
이것도 완전히 꽃을 피운 건 아니지만 야생에서 보기는 처음이다.
억새밭은 모두 불태워져 있었다.
언젠가 억새밭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몇 년에 한 번인가 이렇게 태워줘야 한다고 들은 기억이 있기에 그런가 보다 한다.
가을이 되면 각종 야생화들이 강인한 생명력으로 잿속에서 피어날 수 있는 건지 궁금해진다.
불 태운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지 회오리 바람이 불 때면 재들이 나선형으로 공중을 선회하는 모습이 확연히 보인다.
억새밭 중간이나 바로 옆에서 자라고 있는 참나무 종류들의 줄기는 연기에 그을려 시꺼멓다.
막 새순을 내고 있다가 변을 당하여 잎들도 모두 오그라져 있다.
반대편 가지는 수꽃을 어느 정도 매달고 있는데 불에 덴 쪽의 가지는 너무 놀란 나머지 꽃망울을 낼 엄두를 못 내고 있다.
우리들 인간의 도락을 위한 희생치고는 다소 가혹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예상했던 대로 오늘 등산 통제는 없었다.
팔각정 갈림길에서 좌측으로는 은적사에 이르는 하산길이다.
정상을 향해 우측 경사로를 어느 정도 오르다 밑을 내려다 보니 산정호수에서 커다란 분수가 물줄기를 내뿜고 있다.
날씨가 우중충하니 분수는 시원하다기 보다는 춥다는 느낌을 준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나처럼 산정호수를 굽어보고 있는 나무 하나를 발견한다.
꽃을 버거울 정도로 많이 매달고 있다.
수피가 하얗고 껍질이 얇게 벗겨지지 않아 처음에는 무슨 나무인지줄 몰랐는데 암수꽃차례 모습이 도감 속의 그림이나 설명과 일치했고 또 도감에서 사스레나무도 노목이 되면 수피가 세로로 깊게 갈라진다고 되어 있어 사스레나무로 동정하였다.
사스레나무의 꽃차례는 원래 밑으로 처지는데 이 녀석들은 대부분 고개를 바짝 처들고 있는 점으로 보아 핀 지 얼마 안된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 꽃차례가 달릴 때는 이렇게 위를 향하는 것은 이전에 자작나무에서도 확인한 바가 있기에 낯설지가 않다.
팔각정을 지나서부터는 능선을 따라 노랑제비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역시 노랑제비꽃은 높은 산에서만 자란다고 하더니 정말 그런가 보다.
이전에 천마산에 갔을 때도 정상 부근에서만 보았던 꽃이다.
비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왕창 쏟아지기라도 하면 그대로 하산하고 말 텐데 내리는 듯 마는 듯 하다가 잠시 강도를 높이곤 하는 빗줄기가 나를 우유부단하게 만든다.
옷이 젖어 축축한 느낌이 더해질 무렵 마침 비 피하기에 좋은 바위가 나타나기에 잠시 그곳에 머무르기로 한다.
그러나 비는 그 강우량을 늘였다 줄였다는 하되 전혀 그칠 의사는 없는 것으로 판단돼 다시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마른 풀들과 쌓인 낙엽 위에 듣는 빗방울 소리가 음악처럼 들리지 않은 건 내 의사결정을 방해한 비 책임이라고 혼자 강변해본다.
팔각정에서부터 정상까지는 완만한 능선길이라 걷는데 그다지 큰 힘이 들지 않는다.
등산로 주변에는 나무도 모두 베어져 있고 풀들도 파헤쳐져 있어 시야는 시원스레 뚫려 있다.
아마도 군부대에서 사격훈련에 필요하여 그런 조치를 취한 모양이다.
이 능선길에서는 진달래가 이제 막 절정기에 들었으나 개체수가 많지 않아 그다지 화려한 느낌을 주고 있지는 못하다.
파헤쳐 놓은 경사면에서도 제비꽃들은 피어난다.
알록제비꽃도 여럿 눈에 띄는데 그중 잎에 흰색 무늬가 거의 없는 게 있어서 디카에 담았다.
이전에 알던 상식으로는 이런 것을 청알록제비꽃이라고 따로 분류한다는 사실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중에 집에 와서 보니 청알록제비꽃은 알록제비꽃으로 통합되었고 대신 자주알록제비꽃이란 게 새로 생겼다.
찍어온 사진을 살펴 보니 입구에서 찍은 것과 능선에서 찍은 것이 서로 달랐다.
설명과 비교해 보니 하나는 알록제비꽃이고 다른 하나는 자주알록제비꽃인 것으로 판단되었다.
우연히 두 종을 모두 필름에 담은 것이다.
자주알록제비꽃은 알록제비꽃에 비해 잎 뒤의 자주색이 뚜렷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 모양인데 꽃대가 잎보다 낮은 특징도 가지고 있다 한다.
정상까지 가는 동안 제비꽃 이외에 발견한 건 족도리풀 하나에 불과했다.
정상에 이르니 드디어 하늘이 말짱해지기 시작한다.
마치 내가 명성산의 시험에 들었던 듯한 느낌이 일 순간 든다.
비로 인해 약간의 시련은 있었고 기대한 만큼의 식생은 만나지 못했지만 그래도 마음에 들어선 여유공간은 많이 넓어졌음을 느낀다.
이런 게 바로 산행의 묘미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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