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꽤 멀기는 하지만 선유도를 찾았다.
작년에 이곳에서 많은 수생식물들을 만났던 기억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수생식물들의 꽃을 보기에는 아직 때가 일렀다.
꽃을 피운 것은 거의 없었다.
도착하자마자 단팥빵 하나 먹어가면서 천천히 온실 쪽으로 이동하다가 길가에서 작은 식물 하나를 발견한다.
일견 선개불알풀 같은데 이제까지 보아왔던 것과 비교하면 키가 상당히 큰 편이다.
물론 그래봐야 한뼘 남짓에 불과하다.
뭐 키야 그럴 수 도 있겠거니 하고 꽃을 살피는데 잎겨드랑이에 핀 흰색 꽃이 육안으로 식별이 되질 않는다.
줌으로 당겨봐도 꽃 모양이 선명하지 않다.
더구나 아래쪽 잎겨드랑이는 흰색이 아닌 갈색이다.
아마도 열매이거나 시든 꽃일 거라 생각하고 만다.
현장에서 동정이 안 되면 열심히 구석구석 사진을 찍어오는 수밖에 뾰족한 도리가 없다.
집에 와서 살펴 보니 흰색 꽃은 꽃잎이 완전히 벌어지지 않아서 형태만 간신히 꽃이라는 걸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선개불알풀은 아닌 것이다.
그러고 보니 선개불알풀은 꽃이 보라색이다.
언뜻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제비꿀이란 풀이 생각난다.
도감을 찾아보니 제비꿀은 잎이 선형이고 긴 점만으로도 사진과 일치하지 않는다.
사진 속 식물은 잎이 긴 타원형이다.
이번엔 또 갑자기 문모초란 풀 이름이 떠오른다.
문모초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도 그 이름이 떠오른 이유가 있다.
작년에 전라도 광주에 있는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남는 시간에 근처 화단을 어슬렁거리는데 아주 작은 풀꽃 하나가 눈에 띄었다.
잎겨드랑이에 꽃처럼 보이는 것을 달고 있는데 도대체 식별이 되지 않아 무작정 사진만 열심히 찍어왔다.
그러나 결국은 그게 무엇인지 동정하지 못하고 '동정하지 못한 것들' 코너에 넣어두었는데 그 얼마 뒤 어떤 고수분이 선개불알풀이라고 댓글을 달아주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고,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보름쯤 전인가에 누군가가 또 댓글을 달아 선개불알풀이 아니라 문모초로 보인다면서 친절하게도 문모초는 선개불알풀과 비슷하여 사람들이 흔히 혼동하곤 한다는 말을 덧붙여 놓았다.
여러 자료를 참조한 결과 그 풀은 선개불알풀이 맞는 것으로 결론내렸다.
이런 연유로 처음에 선개불알풀이라고 생각하고 사진을 찍었던 이 풀꽃에 대해 문모초란 이름이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이다.
문모초에 대한 자료를 조사해 보니 그 설명이 찍어온 사진의 특성과 일치했다.
이렇게 해서 난생 처음으로 문모초라는 것과 정말 우연히 해후한 셈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열매 부분이다.
줄기 아래쪽의 갈색 부분은 찍어온 사진을 보니 열매가 확실하다.
사진을 아주 자세히 여러 장 찍었기에 열매가 점점 벌어지다가 그 안에서 종자가 나오는 과정이 그대로 사진 속에 담겼다.
모든 열매 사진에서 꽃받침과 열매 껍데기 가장자리에 털이 없는데 유독 한 사진에서만 털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것도 사진을 확대해 보니 털 끝에 점액 방울 같은 게 맺혀 있는 듯하다.
자료를 보니 열매는 흔히 벌레집으로 된다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의 의미가 애매모호하여 다른 도감을 참조해 보니 열매 안에 벌레가 기생하기도 한다는 말이다.
사진 속에서도 벌레가 들어 있기는 한데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죽은 모습이고 그것도 체액을 모두 빼앗긴 채 말라서 부스러진 모습이다.
불현듯 벌레잡이의 통발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생긴 의문이 시간이 지나도 도무지 꼬리를 내릴 줄을 모른다.
혼자 몇 가지 추론을 도출해 본다.
1. 문모초는 줄기 아래쪽에 열매처럼 위장된 벌레잡이 도구를 가지고 있다.
2. 아니면 열매에서 종자를 방출한 후에 열매 껍데기와 꽃받침 가장자리에 촉수가 생겨 벌레잡이 도구가 된다.
3. 이도 저도 아니면 단순한 사진 상의 오류다.
뭐, 단순한 추측만으로 끝이다.
현재로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온실 안에 있는 식물들은 대부분 작년에 보았던 것들이다.
새로 들여놓은 건 하나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꽃을 피운 것들 중에 백정화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수 년 전 순천의 어느 민가 울타리에서 본 기억이 참으로 오래도 가고 있다.
기억의 메카니즘이 어떤 건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식물은 아주 여러 번 보아도 볼 때마다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 있는데 어떤 식물은 딱 한 번만 보아도 그 이름이 잊혀지지 않는다.
백정화도 후자에 속하는 식물 중의 하나이다.
란타나, 산호수, 에델레아, 자주닭개비, 종려방동사니(시페루스), 크로톤 등이 꽃을 피우고 있다.
이 중 산호수와 크로톤의 꽃은 처음 보았다.
온실 밖에 있는 수생식물 중에서 그나마 꽃을 피우고 있는 건 말즘과 매자기, 큰고랭이 정도이다.
온실 벽면에 멀꿀이 철제 지주를 타고 오르고 있어 올려다 보니 멀꿀의 꽃이 수줍게 나를 내려다 본다.
멀꿀도 으름덩굴과 같은 덩굴성 식물이면서 꽃잎이 손꼴겹잎으로 유사해 꽃이 없으면 가끔 혼동되곤 한다.
이번 기회에 확실한 구분점을 정리해 보니 멀꿀의 잎 끝은 뾰족하고 으름덩굴은 약간 패여 있다는 점이 다르다.
멀꿀 꽃을 한참 찍고 있는데 한 아이가 다가와 뭐 하느냐고 묻는다.
꽃 사진 찍는다고 하자 히죽히죽 웃기만 한다.
얼굴에 장난끼가 잔뜩 서려 있다.
단체로 관람 온 모양인데 안내자는 열심히 부레옥잠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이 녀석은 대열에서 이탈해 여기저기 다니면서 찝적거리는 데 더 열중이다.
짜스기, 하필이면 나를 그 대상에 포함시키다니.
교육이란 건 참으로 쉽지 않다.
더구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현장학습은 더욱 그런 것 같다.
아이들이 관심을 보일 대상이 얼마나 많은데 기껏 부레옥잠 정도 하나 가지고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용어를 써가며 긴 시간 설명을 해봐야 그게 귀에 들어올 리가 없을 것이다.
회사 다니던 시절 교육을 담당한 적이 있다.
당시의 경험이 내게 말해준 건 피교육생의 10% 정도만 건지고, 또 그 10%에게 교육내용의 10% 정도만 전달되어도 대성공이라는 것이다.
지금 저 안내자 곁에 모여 있는 아이들 중 이 10%에 해당하는 학생이 있어 후일 식물계에 위대한 족적을 남길 사람이 있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찝적거리는 아이 머리에 꿀밤 한 대 먹이려다 그냥 머리만 쓰다듬고 자리를 뜬다.
가는 도중에 때죽나무를 만난다.
종처럼 생긴 꽃들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는 모습이 좀전에 보았던 아이들 모습 같다.
조팝나무와 댕강나무 종류도 하나씩 눈에 띈다.
조팝나무는 언뜻 보아 잎 모양이 둥글고 중간 이상에만 톱니가 있는 것이 이제까지 봐왔던 것과 다르다.
얼마 전에 조팝나무류의 특징에 대해 정리를 해 본 바 있기에 메모 노트를 꺼내들고 현장에서 동정해 보지만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다.
나중에 자료를 보고 나서야 산조팝나무라는 걸 알게 된다.
댕강나무 종류는 아직 정리해 본 바가 없기에 사진만 찍어 왔는데 그게 바로 줄댕강나무였다.
백당나무 같은 꽃을 피운 녀석 앞에 서서 잎을 살펴 보니 잎에 결각이 없다.
그렇다면 이건 나나스덜꿩일 거란 생각이 든다.
그런데 팻말에는 엉뚱하게도 병아리꽃나무라 적혀 있다.
둘은 꽃 모양이 달라도 한참 다른 나무인데 혹시 주변에 병아리꽃나무가 있나 살펴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팻말이 잘못된 경우는 어딜 가나 심심치 않게 발견되곤 한다.
이런 오류는 심지어는 식물을 전문적으로 취급하고 있는 국립수목원이나 홍릉수목원 등에서도 발견된다.
주위가 시끌벅적하다.
일단의 사람들이 모여 있고 커다란 녹화용 카메가가 몇 대 보이는 걸로 봐서 무슨 영화나 드라마를 촬영하고 있는 듯하다.
언뜻 보니 아는 배우는 눈에 띄지 않는다.
하기야 설사 티브이에서 본 사람이 있었다 하더라도 내 눈썰미에 그 사람을 알아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밥 먹고 합시다."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 쪽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려 눈을 돌리니 한 스텝이 안에 있는 얼음을 깨기 위해 패트병을 땅에 부딪치는 소리다.
한참을 그렇게 반복하는데 여간 시끄럽지가 않다.
그 소리가 듣기 싫어 자리를 피해 화단을 살피는데 이번에는 어린 아이들이 화단 속을 헤집고 다니는 광경이 목격된다.
한 아이가 숙이고 있던 몸을 일으키더니 마침 옆을 지나던 내게 자랑스럽게 소리친다.
아저씨, 나 이거 보물 찾았다.
우리 어린 시절 소풍 때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의 재미를 위해 화단의 풀섶에 상품 이름이 기재된 종이를 숨겨둔 모양이다.
잠시 동안의 아이들의 유희를 위해 기획된 프로그램에 화단의 풀들은 단지 그곳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오랜 시간 키운 몸체가 꺾이고 짓밟히는 수모를 당하고 있다.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작년에 보았던 붉은인동이 있는 곳으로 이동한다.
탐스런 붉은 꽃망울을 잔뜩 선보이고는 있지만 그 중 몇 개만이 입을 벌리고 있다.
아직은 만개의 시기가 아닌 모양이다.
작년에 이곳에서 붉은인동의 열매도 찍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 모습이 어떠 했는지는 가물가물하다.
공원 끝에 다다라 관망대 위에 오르니 바람이 시원스럽게 불어준다.
양버들 몇 그루가 관망대 중간에 비워둔 공간 위로 줄기를 뻗고 있어 바로 옆에서 잎을 관찰해 보기 좋다.
양버들은 잎의 폭이 길이보다 더 길다는 게 생각나 한 번 확인해 보기로 한다.
언뜻 보기에는 잎 끝이 길게 뾰족해 길이가 더 길어 보이는데 막상 재보니 폭이 더 길다.
그렇지만 모든 잎이 다 그런 건 아니었다.
상당수는 그래도 다른 나무들의 잎처럼 길이가 더 길다.
그러니 양버들의 잎은 길이와 폭의 크기가 비슷하다라고 기억하는 편이 더 좋으리란 생각이 든다.
사진으로 그 관찰기록을 남기려다 세찬 바람의 심술로 포기하고 만다.
길거리에서 사가지고 간 샌드위치를 먹기 위해 벤치에 앉을까 하다가 난간 쪽으로 간다.
탁 트인 한강이 시야에 든다.
성산대교 아래에선 월드컵분수대가 물줄기를 쏘아 올리고 있다.
물줄기가 높지도 않고 날씨가 덥지도 않아 그다지 시원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발 아래에선 거위(맞나?) 다섯 마리가 한가로이 유영을 즐기고 있다.
사실 유영이라기 보다는 파도타기다.
흔들리는 물결에 몸을 내맡긴 채 동동 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 보니 얘들이 물속에서 간간히 발을 움직이고 있다.
물살에 떠내려 가지 않기 위함인 듯하다.
그런 노력이 있기에 계속해서 거의 같은 자리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한 경구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건데 위에서 내려다 보니 물속의 발놀림이 훤히 보여 그 경구의 진위가 바로 확인된다.
그런데 쟤들이 왜 저기에 있는 거지?
혹시 나한테 뭔가를 충고해 주기 위해 일부러 행차한 건가?
일단 목표가 정해졌으면 게으름 피우지 말고 일로매진해라. 그렇지 않으면 현상유지도 힘들 거다.
뭐, 이런 충고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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