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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단상(斷想) 모음

어느 날 아침

by 심자한2 2009. 6. 2.

 

출근하자마자 사무실 창문을 여니 뒤뜰에서 밤새 기다리고 있던 잔 바람이 일거에 쏟아져 들어옵니다.

그 바람 위에는 이름 모를 새소리가 실려 있습니다.

아침이면 으레 맞이하는 풍경인데도 유독 오늘은 그 작은 현상이 내 마음속 수면에 동심원을 그립니다.

내가 있는 나라가 아무리 불편하고 내가 처한 곳이 아무리 누추해도 이런 자연의 작은 선물이 있다는 것에 대해 진정으로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할 일입니다.

업무가 내게 주는 스트레스가 너무도 크다는 이유로 난 지금까지 마음 한 번 제대로 추스르지 못 했었다는 자책이 듭니다.

사무실에서 서류 정리하는 정도의 빈도로만 마음을 다스린다면 번민은 내 안에서 똬리를 틀 여지가 없을 겁니다.

정성 부족이란 사유를 시간 부족이란 핑게로 슬쩍 대치해 왔던 평소의 내 나태와 위선이 쑥스러워지는 아침입니다.

오늘 아침의 새소리는 내게 그런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 평소와 달리 좀 더 컸던 모양입니다.

 

내친 김에 뒤뜰로 나가 봅니다.

가장 먼저 분꽃이 눈에 듭니다.

휴가 가기 전에 집주인이 묘목을 심어 놓았었는데 그새 녀석은 훌쩍 커서 꽃망울까지 맺고 있습니다.

화단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는 민트들은 대부분의 포기에 잎만 있고 새로 난 포기에만 꽃차례가 달려 있습니다.

마치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전가의 보도는 향기지 꽃이 아니라고 강변하고 있는 듯합니다.

잎을 살짝 문지른 후 코를 들이대봅니다.

후각을 통해 감지된 민트 향기가 내 나머지 네 가지 감각마저 자극합니다.

그 옆에 있는 레몬제라늄인지 로즈제라늄인지가 눈을 흘깁니다.

녀석의 시샘에 난 기꺼이 승복합니다.

두 가지 향기가 뒤섞여 폐부 깊숙이 리비아의 6월을 전해줍니다.

민트들 사이에 홀로 자라난 큰뽀리뱅이로 보이는 녀석은 자신의 비호감형 외모로 인해 내 관심의 유도를 포기했는지 두상화를 들어 하늘만 멀거니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 방향을 좇아 시선을 올리니 그곳에는 알알이 영글어 자고 있는 포도송이가 싱그런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죽은 듯이 보이던 가지에서 언제 이렇게 많은 잎들이 돋았고 언제 이렇게 많은 열매 송이를 맺었는지 볼 때마다 신기하기만 합니다.

화단 양 옆에 시립하고 있는 데이트야자도 열매를 충실히 맺기 위해 모여 있던 열매 가지를 활짝 벌렸습니다.

그래야 열매끼리 서로 접촉하여 상하는 일이 없을 거라는 계산을 녀석은 어떻게 해냈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행복이 산 너머에 있지 않고 사실은 내 안에 있듯이 기적도 특정한 때와 장소와 상황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고 사실은 이렇게 일상의 환경 속에 항상 존재하고 있다는 주장에 오늘 아침 난 후한 점수를 주기로 합니다.

그간 꿈꿔 왔던 바닷가 언덕 위나 저 푸른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은 이제 그만 꿈의 영역에 깊숙히 넣어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멀기만 한 소망에 대한 집착이 그 동안 오늘 아침과 같은 행복과 기적으로부터 나를 차단해 왔습니다.

먼 곳에 두었던 시선을 거두어 내가 지금 속해 있는 "여기"와 "이곳"으로 방향을 틀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는 진부한 느낌이 문득 이 아침에 새삼스러워집니다.

곱게 내린 햇살과 밀어를 나누고 있는 와일드포인세티아의 작은 꽃차례에 이 각득을 화두로 던져주고 자리를 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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