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내가 첫새벽에 집을 나선다.
잠실로 향하는 첫차를 타기 위해서다.
며칠 전에 알아둔 첫차 시간애 맞춰 버스가 도착한다.
사내는 말없이 차에 오른다.
단말기에서 나는 삑~ 하는 소리에 사내는 다시 한 번 오늘의 목적지를 되새겨본다.
안면도.
오래 전부터 한 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건만 이상하게 사내는 그 소망이 현실화되고 있는데도 별로 즐거운 기분을 느끼지 못한다.
사내는 자기 안에서 이는 바람소리를 듣는다.
사내는 아마도 텅 빈 버스보다 더 큰 공동이 자기 안에 있을 거라 생각한다.
달리는 버스 안에 자신이 타고 있는 건지, 정지된 자기 안에 버스가 질주하고 있는 건지 사내는 헷갈려 한다.
몇 정거장을 지나자 많은 사람들이 버스에 오른다.
사내는 옆 좌석에 놓아 두었던 배낭을 무릎 위로 옮긴다.
두 정거장 후에 사내의 옆 좌석에 한 여인이 앉는다.
그녀는 앉자마자 자세를 잡더니 이내 고개를 떨구고 잠을 청한다.
그녀를 보면서 사내는 새벽이 피곤한 건 목표가 있는 일상을 가진 자의 전유물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은 그 목표를 위해 새벽에 어디론가 떠난다.
사내는 떠나는 것 자체가 목표인지라 아무리 새벽이라도 별 피로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의 새벽은 시간표 첫 부분에 있겠지만 사내의 새벽은 시간표 어디에든 있을 수 있다.
그들에게 새벽은 시작이지만 사내에게 새벽은 시작도 끝도 중간도 될 수 있다.
물리적인 시간의 구획은 사내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내는 동서울터미널에서 안면도행 버스로 갈아탄다.
정확히 기사의 운전습성만큼 뒤뚱거리는 버스 안에서 사내의 상념은 그 이상으로 흔들린다.
상념은 좁은 뇌리에서 전자처럼 빠른 속도로 좌충우돌하다가 가끔씩 기사가 브레이크를 밟을 때마다 반전자를 만난 듯 즉각적으로 소멸해버린다.
멍 했던 사내의 눈에 시각이 다시 돌아온다.
창밖으로 향한 시선을 역류해 온 갖가지 풍경들이 망막에 뛰어들지만 기억회로를 타는 행운을 갖는 건 지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모두 반사되어버리고 마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내는 그 선별 작업을 행하는 주체가 무엇인지 문득 궁금해진다.
내 안에 내 의식이 지배하지 못하는 영역이 따로 있는 건가?
그 녀석이 혹시 무의식이란 놈이 아닐까?
사내는 의식과 무의식 간에 접점은 있겠지만 공유면적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무의식의 활동영역에서 의식은 한낱 장식에 불과하다.
집을 나선 지 너댓 시간 만에 사내는 안면도 버스터미널에 도착한다.
명색이 바닷가라고 터미널 길건너에는 간단한 어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군데군데 좌판을 벌이고 있는 촌로들의 표정이 문득 생경해진다.
버스가 새벽공기를 가르는 동안 이곳에서는 이미 일상의 소란이 어제의 그 모습 재현에 돌입한 상태다.
사내는 일 순간 의도하지 않은 길로 들어섰다는 낯선 느낌이 든다.
자신이 밟고 있는 지표면이 마치 남의 자리인 것처럼 어색해진다.
잘못 들어선 금지구역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야겠다는 심정으로 사내는 재빨리 발걸음을 옮긴다.
눈짐작으로 잡은 방향이 운이 좋게도 제대로 된 길을 안내했다는 걸 사내는 도로표지판에 적힌 '꽃지 해수욕장" 이란 말을 보면서 느낀다.
꼭 그곳으로 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초행인 곳에서는 그래도 친숙한 이름을 가진 곳이 어느 정도 안도감을 준다.
가끔은 미지의 세계가 더 큰 설렘을 가져다 주기도 하지만 사내는 오늘은 그런 모험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30여 분 정도 걸은 후에 사내가 도착한 곳은 꽃지 해수욕장 옆에 있는 무슨 해수욕장이다.
사내는 그 해수욕장의 모래사장을 걸으면서 한 두 가지 식물을 만난다.
이상하게도 디카를 꺼내려는 손동작에 망설임의 기색이 역력하다.
이들을 위해 그 긴 시간을 투자해 먼 거리를 달려왔는데 막상 현장에서는 왜 이곳에 왔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이율배반적인 느낌이 사내의 반색에 제동을 걸고 있다는 걸 사내는 알아차린다.
그래도 사내는 투자한 시간이 아까워 카메라의 촛점을 이리저리 맞춰가며 사진 몇 장을 찍는다.
다른 때와 다른 점은 단지 사진만 찍는 것이지 피사체와의 대화는 없다는 것이다.
모래사장이 끝나는 곳에 있는 방파제를 넘어 작은 마을 하나를 지나니 꽃지 해수욕장이 나타난다.
시야에 든 해수욕장 모래톱의 끝이 아스라하다.
해변이 참 길기도 하다는 생각이 사내의 마음속에 일말의 기대감을 심어준다.
저 정도 길이라면 뭔가 좀 있어도 있을 거야.
여기서도 사내는 두어 가지 식물과 만난다.
처음 보는 것들이다.
하기야 이전에도 바닷가에서 꽤 여러 번 보았겠지만 단지 기억하지 못할 뿐인지도 모른다.
해안 가까이에 있는 할미/할아비 바위가 어딘가 어색하다고 사내는 느낀다.
그 바위 밑에 잠겨 있던 전설은 해수욕장 입구 안내판에 새겨진 이후 신비감을 영원히 상실했다.
인간의 상상력은 그 표지판 위에서 마침표를 만난다.
전설이란 면면히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윤색되어야만 제맛일 거라고 사내는 생각한다.
그 뒤편에 있는 등대만이 아직까지 그 전설의 천이 과정을 이어가고 있다.
해안의 넓이에 비해 바다는 그저 밋밋하기만 할 뿐이다.
아니 오히려 그 넓이가 해안선을 더 단조롭게 만들고 있다고 사내는 생각한다.
그 단조로운 풍경 속에 들어 있는 연인이나 가족들의 표정은 왜 나하고는 판이하게 다른 걸까, 사내는 자문해본다.
뻔히 알고 있는 답이기에 사내는 그 답에 애써 그럴싸한 왜곡을 시도하려는 수고를 아끼기로 한다.
사내는 그 풍경 속에 자신을 넣어보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차단막이 있는 건지 도무지 진입이 되질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사내는 이미 풍경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내는 문득 자신이 같은 그림 속에 존재는 하지만 혼자만 '아웃사이더' 란 이름표를 달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해본다.
그 의구심이 사내의 발걸음을 멈췄다.
저 긴 해안선 끝까지 가봐야 이런 이질감이 해소될 리 없다고 사내는 생각한다.
이번에는 그 생각이 사내의 발걸음을 중도에 돌렸다.
이제까지 선택받은 자의 자랑스런 특권인 것처럼 느껴졌던 식물 탐사 행보가 드디어 본연의 소외감을 인식하기 시작했나 보다, 하고 사내는 생각한다.
그 원치 않는 결과가 사실로 확인될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몸짓인 양 사내는 발걸음에 속도를 더한다.
터미널에서 사내는 미련없이 서울 행 버스에 오른다.
왕복 9시간 정도의 이동시간과 달랑 두어 시간 정도의 체류시간은 머리와 몸통이 바뀐 형국이다.
그래도 사내는 이 결정에 별반 후회하는 눈빛이 아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그 시점에서 새로운 새벽을 시작하면 되겠지.
사내는 올 때의 가슴속 공동이 돌아갈 때는 해안의 넓이만큼 더 넓어졌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싫다는 듯이 고개를 얼른 의자에 모로 붙이고 눈꺼풀을 내려 시선을 차단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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